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목 Nov 22. 2022

기영이

ROTC 기초 군사 훈련 중


기영이를 만난 건 2010년 어느 날이었다. 우린 ROTC 후보생이 되기 위해 기초 군사 훈련에 입소했다. 가나다 순서로 생활관이 편성되었고, 각각 이 씨와 정 씨인 우리는 같은 생관에 배정되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적거려도 기영이와 연관된 장면이 떠오르질 않는다. 사실 기영이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그때의 기억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아마 첫 군사 훈련이었던 탓에 무진장 긴장을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기영이와 어떻게든 몇 마디만 나눠봤어도 금방 친해졌을 것 같은데 그런 기회가 일찍 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학군단에 입단하고서야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급격하게 친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기영이가 내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 건 그 해 9월 어느 날이었다. 모든 중요한 순간들이 그렇듯 이날의 기억도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다.


후보생 시절 중 어느 날


그날은 학교 축제날이었고, 공연을 위해 시스타가 왔었고, 캠퍼스와 대학로는 많은 인파로 분주했다. 기영이와 나는 공연을 볼까 하다가 술이나 마시자며 궁동으로 향했다. '오징어와 친구들'이라는 술집에 앉아 기영이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연거푸 소주잔을 들이켰고, 테이블 한쪽 끝으로 초록색 병이 쌓여갔다. 혀는 진즉이 꼬부라졌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우리는 마음 한 구석에 뱀처럼 똬리를 튼 응어리들을 토해냈다. 나는 이날 어느 누구에게도 진솔하게 내비치지 못 한 깊은 속마음을 기영이에게 보여주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 삶에서 처음으로 '즐거운 대화'를 한 때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하고 싶은 대화. 피상적인 것을 훑는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런 대화. 학교는 축제로 들떠 있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깊이 침잠하며 나름의 축제를 즐겼다. 달은 휘황하니 밝았고, 저녁은 끝없이 깊어갔다.


그날 이후 12년이 지났다. 기영이는 내가 최악일 때나, 최고일 때나 늘 곁에 있었다. 기영이가 즐겨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관계의 핵'이 되었다. 삶의 기둥이며, 근원이며, 뿌리인 것, 파괴되면 끝인 것... 중간에 5개월 정도 관계가 단절된 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때도 우리가 서로에게 돌아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기영이는 자기가 경험해보고 좋은 것이 있으면 늘 나를 찾는다. 지금까지 서핑이 그랬고, 캠핑이 그랬고, 백팩킹이 그랬다. 서핑은 내가 영 흥미를 느끼지 못해 따라다니지 않지만 캠핑과 백팩킹은 너무 좋아서 즐겁게 따라다니고 있다. 나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할 취미를 기영이 덕분에 즐기고 있는 요즘이다. 파워 J인 기영이는 늘 계획을 세우고, 파워 P인 나는 늘 즐겁게 기영이를 따른다. 기영이의 세밀한 계획에 언젠가는 뭐 그런 것까지 하냐며 툴툴거린 적도 있지만 결국은 기영이가 옳았다. 그래서 요즘엔 웬만하면 기영이가 하자는 대로 한다. 


대청호 인근 박지에서


이번 백팩킹을 준비하면서도 기영이는 본인이 일전에 박지에서 느낀 감동을 나도 그대로 느꼈으면 한다며 부지런히 준비했다. 출발 시간을 맞추지 못해 해가 일찍 저무는 것을 바라보며 기영이는 내가 그만큼의 감동을 느끼지 못할까봐 못내 아쉬워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잖는가. 함께 하는 사람이 좋다면 좋은 경치와,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이 다 무슨 소용인가.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쉬는 방법을 모르는 나는 잘 쉬는 방법을 아는 기영이 덕분에 이렇게 가끔은 쉼표를 찍고 멈춰 선다. 하늘은 내가 뭘 잘했다고 나의 부족함을 메울 수 있는 사람들로 내 주변을 채우는 걸까.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뻘을 걷듯 힘겨운 삶의 여정에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기영이에게 감사하다. 이야기를 쓰다 보니 더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난 기영이를 위해 해준 게 없어서 조금 찔리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기영이가 날 좋아하는 걸 보면 내가 알게 모르게 기영이에게 뭘 주기는 하는가 보다. 그래서 결론은 앞으로 기영이한테 더 잘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환승연애를 보며 깨달은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