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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목 Sep 17. 2023

고민이 행동 혹은 말로 발현되기까지

시간의 작용

요즘 또 무언가를 결정할 시기가 되어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중이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고민하는 나'와 배경 자아로서의 '나'를 구분하여 스트레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김주환 교수님이 번역하신 책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그리고 직접 쓰신 책『내면소통』을 읽으면서 생긴 변화다.


어제는 샤워를 하면서 또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문득 고민도 열매처럼 '때'가 되어야 수확이, 그러니까 해결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시간과 관계되어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이미 펼쳐져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인간의 관념에 불과한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삶은 극도로 정교하게 프로그램(인과율)되어있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 개인의 순수한 자유의지가 낄 자리가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 나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한데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당장에 내가 느끼는 삶은 아주 피동적이다. 고민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며 해결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얼마 전에 결혼과 관련된 글을 쓰면서도 '결혼했다'가 아니라 '결혼되었다'라고 표현했겠는가. 삶은 정해져 있던 것이 펼쳐지는 것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주 치밀한 인과율에 의해서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작동하는 듯하다. 혹자들은 이런 세계관이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나'는 허무주의에 빠지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아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프로그램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인도(힌두교) 구루 중의 한 명인 라마나 마하리쉬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뿐이다. 육체는 프라라브다 카르마(현생에서 받아야 하는 과거생에 의해 축적된 카르마들의 일부. 운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에 의해 이미 결정된 행위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이때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육체의 행위에서 파생되는 열매에 집착할 것인지, 아니면 동일시로부터 벗어나서 단순히 그 육체의 행위들을 지켜보는 자로 남을 것인지, 그 선택에 있어서 인간은 자유롭다.



한 마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자유나 자유 의지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영역들에서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오감을 통해 입력되는 정보만 인지할 수 있기에 '있음'만을 인지할 뿐, 그 자리에 늘 함께 있는 '없음'은 여전히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나(있음)라는 사람 또한 공간(없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은은하게 작용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민이 해결되어 간다. 내가 이런저런 경우의 수와 위험 요소들을 파악하여 결론에 다다르는 듯하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 '행위하는 나'를 바라보면 이것은 참으로 본능적이며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철이 바뀌면 본능적으로 수백, 수천 킬로를 날아가는 날아가는 철새처럼 어디론가로 향하는 중이다. 거기에 나의 의지는 없으며 오로지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만이 존재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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