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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연 Nov 03. 2022

삶에 가장 강렬한 질문

돈은 인생에서 무엇입니까?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선생님은 삶에 가장 강렬한 질문은 돈은 인생에서 무엇입니까?”라고 했다. '나의 삶에 가장 강력한 질문은 무엇일가?'생각하니 떠오르는 하루가 있다.  

인도 영화 <런치박스, 2013> 속 주인공 ‘일라’는 오전 시간 분주히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남편의 사무실로 배달을 시킨다. 매일 아침 인도 뭄바이에서는 5천여 명의 도시락 배달원이 부인들이 만든 점심 도시락을 남편의 사무실에 배달한다. 그러나 그녀의 특별한 점심 도시락이 정년 퇴임을 앞둔 중년의 외로운 회사원 ‘사잔’에게 잘못 배달된다. ‘맛있게 잘 먹었다.’는 편지를 받고 도시락을 받은 사람에 대한 일라의 호기심이 커진다. 일라는 도시락이 다른 사람에게 배달된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는 대신, 도시락 안에 편지를 넣는다. 그렇게 시작된 도시락 편지를 통해 두 사람의 일상은 위안과 활력을 얻는다.

 <런치박스>는 무뚝뚝한 남편 보다 낯선이가 건네는 다정한 편지, 말 한마디가 일상에 위험한 활력을 넣을 수도 있다는 부분에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포인트에서 공감을 느꼈다. 이 영화를 봤을 당시 나에게는 나만의 공간이 간절히 필요했던 때이다. 그래서 더욱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점심 도시락 준비가 끝나고 배달원에게 배달 보내고 난 후의 일라의 모습이다. 좁은 주방, 작은 식탁에 앉아 혼자 커피를 마신다. 조용한 적막과 찰라의 편안함, 그 모습이 세상 부러웠다.     

 

열 명갑자기 대가족이 함께 살다.     

  새집으로 입주를 위해 살던 집을 내놓았다. 입주까지는 약 2년의 시간이 남았기에 천천히 진행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집을 내놓자 마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일 년 동안 보러오는 사람이 없었네.’, ‘집 파는데 6개월 걸렸네.’ 하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이 기회를 놓치면 집을 팔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과 조급함이 있었다. 집을 팔고 나니, 3개월 안에 새로운 주인에게 집을 내 주어야 했고, 우리는 입주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평촌에서 학원 운영을 시작한지 약 6개월이 지난 터였다. 당시 아이들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다녔다. 두 아이의 하원 시간은 4시, 남편과 나의 퇴근 시간은 7시. 우리 아이들이 약 3시간동안 혼자 있을 수 없어 시부모님께 그 시간을 부탁했다. 동탄에 사시는 시부모님께서 봉담까지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오고 가시지만, 매일 아이들을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 돌보는 사람을 구했고, 그 이모님이 그 3시간 동안 아이들을 자기의 집에서 돌봐주었다. 그 때 그일만 아이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엄마, 나 가만히 앉아 있기 너무 힘들어.”

 “엄마, 나도 복숭아 먹고 싶어.”

 “엄마, 나 만화 봐도 돼?”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래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힘든거야.’, ‘복숭아 사줄까?’,‘응, 보고 싶은 거 봐~’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좀 더 말을 잘 하게 되면서, 말한다.     

 “엄마, 우리 그냥 둘이 집에 있을게. 우리 잘 할 수 있어. 그 이모네 집 안가면 안돼?” 

 “왜?”

 “엄마가 우리 데리러 오기 전까지 계속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해. 저번에 복숭아도 이모랑 이모네 아이들만 먹고, 나도 먹고 싶다고 하니깐 안된대. 이모네 형, 누나는 게임만 하고 TV도 안보면서, 우리 보고 싶은 것은 못 보게 해. 장난감도 못 만지게 하고! 나 정말 그 집 가기 싫단 말이야!”     

 말이 조금 느렸던 둘째도 형을 따라 말한다.

 “응, 시러시러. 나도 장난감 못 만지게 해서 똑땅해.”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보다. 급여는 물론, 시골에서 올라오는 쌀, 과일, 필요한 것들은 이모네 집에 우선 드렸다. 곧 초등학교에 들어갈 아이를 위해 좀 더 학교도 가깝고, 공원도 있는 곳, 삶에서 누릴 것들이 많거나 가까운 그런 곳으로 이사가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그때 나는 유치원과 학원이 끝나고 혼자 있을 아이를 돌봐줄 단 몇 시간이면 된다고 생각했던 우매한 엄마였던 것이다.      

 모든 일은 한 순간에 벌어졌다. 집이 팔린 일, 아이의 상처받은 마음. 시댁과의 합가.

힘든 것을 알면서도 남편에게 먼저 말했다. 타운하우스는 4층까지 있으니, 우리 입주하기 전까기 시부모님과 함께 살자고. 약 1년 6개월 후면 입주하는데 집 구하기도 애매한 기간이라고. 3층과 4층 다락방, 옥상에는 수영장 설치까지 할 수 있으니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환경일 거라고. 무엇보다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사랑으로 우리 아이들을 봐주실 거라고. 다 맞는 얘기지만, 함께 사는 것은 힘들다는 것도 맞는 얘기이다.      

 입주 전까지 함게 살자고 말씀을 드렸다. 다 큰 결혼한 자식이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부모님 밑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말씀드리니 감사하게도 흔쾌히 그러자고 하셨다. 나에게는 우리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에 대한 부분이 가장 컸기에, 나의 힘듦을 생각할 겨를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시부모님과의 두 번째 합가가 시작되었다. 1년 6개월의 시한부 합가이지만 마음 단단히 먹었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나의 일도 할 수 있었고,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봉담에서 평촌은 30분 정도면 출퇴근이 가능했다. 그런데 시부모님과 합가한 동탄에서 평촌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리며 출퇴근길이 두 배로 멀어졌지만, 두 배, 세 배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 사는 아가씨네가 육아휴직을 일 년 받아 남편, 아이 둘이 함께 한국으로 왔다. 우리 식구 넷, 아가씨네 식구 넷, 어머님, 어버님. 어느날 갑자기 함께 사는 식구가 열 명이 되었다. 딸과 엄마와의 관계는 이것저것 못 할 말이 없이 터 놓을 수 있지만, 아가씨가 오고 나니 시어머니가 달라지셨다. 내 편이 생겨 든든한 마음이셨을까. 손주 넷이 있어서 더욱 힘드셨던 것일까. 딸의 지적들에 불편해 하면서도 모든 것을 딸과 얘기하는 어머님, 늦게 들어오는 남편으로 인해 나는 집에 들어가가 힘들었다. 내 공간, 나만의 공간, 혼자 커피한 잔 마시고 싶은 작은 식탁 하나가 절절히 그리웠다. 더욱 일에만 했다. 아침 일찍 아이들과 함게 나가 밤 늦게까지 일하고, 스터디모임 참여하고, 그 어느때보다 스스로를 바깥으로 돌렸다.     

 그러던 어느날 핸드폰을 두고 와서 집에 다시 들어가려는데 어머님과 아가씨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재는 돈도 못 벌면서 맨날 어디를 그렇게 나가는지 모르겠다. 벌어봐야 얼마나 번다고......”

나는 문 밖에 서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족에서도 ‘우리’가 될 수 없는 ‘나’라는 존재는 많이 방황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마음 안다치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나는 어찌되어도 괜찮다고 버텼다. 그런데 일라가 혼자 커피한 잔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큰 집에 사는데 나만의 공간이 없구나...’          

좁은 주방, 작은 식탁에 앉아 혼자 커피를 마신다. 조용한 적막과 찰라의 편안함, 그 모습이 세상 부러웠다.

'어떻게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나?' 그것이 내 삶에 가장 강력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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