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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해 Aug 08. 2020

용기 있는 세 여자

  여자 셋이 살 게 된 데에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체리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때마침 같이 살던 집의 계약 기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수원을 벗어나 서울로 이사를 하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비싼 서울의 집값이 영 걱정이었다. 마침 후배인 소르가 역시 혼자 상경을 준비한다는 것이 생각났고 두 명보단 셋이 낫지 않겠나 싶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소르 영입 작전을 펼쳤다.     


  소르야 우리랑 서울에서 같이 살래?

  응! 난 좋아!     


  우리 셋의 동거는 그렇게 약속도 정해진 규율도 규칙도 없이 시작되었다. 친구들과 셋이 산다는 말에 사람들은 부럽다며 드라마 <청춘시대>의 '벨 에포크'를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우리 셋의 첫 번째 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와르르 맨션'이라는 이름이 어울렸다.


 나는 갓 졸업을 한 상태, 즉  먹고 살길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었다. 처음으로 무소속 상태가 되었다. 어느 유치원, 어느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평생 어딘가 속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곳이 사라졌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학교를 그리워할 줄은 몰랐다. 이제는 안정적일 수 없겠구나. 불안이라는 단어가 하루아침에 생생하게 다가왔다. 

  남들처럼 대학원 진학을 생각해보기도 했고 무슨 회사든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삶. 어딘가 소속되어있는 나.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알바를 하고 강의를 하면서 뮤지션을 꿈꾸며 자유롭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삶. 견뎌낼 수 있을까? 어느 것에도 자신이 없었다. 내겐 새로 시작할 용기도 음악을 포기할 용기도 없었다.

 매일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불안에 떨었다. 늦은 새벽 작업실에서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인기척을 들으며 자괴감에 빠졌다. 매일 스케줄이 있어 집을 비우는 그녀가 부러웠다.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구나.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우습게도 그때 내가 삶의 화력을 얻게 된 건 다름 아닌 그해 방영한 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당신의 소년에게 투표하라는 그 유치하고도 자극적인 멘트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애쓴다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꽤 재밌었다. 우리나라에서 춤과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 찾는 게 더 드물다. 보기 싫은데 보고 싶다고 해야 하나. 방송을 몇 번씩 보게 되고 각종 기사와 관련 영상을 찾아보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연습생의 영상은 다시 몇 번씩 보고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았다.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끝나면 아쉬웠다. 다음 주가 기다려지고 순위가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는 새 11명의 소년에게 투표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은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 집 세 명의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최애들에게도 투표해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매주 금요일 밤 11시마다 거실에 오순도순 모여 앉게 되었다. 우리 집 공식 행사가 된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10시 30분부터 슬금슬금 시청을 위한 세팅을 시작했다. 체리와 함께 테이블을 펴고 컴퓨터를 켰다. 야식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뭐 먹지. 그때 작업실에 있던 소르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우리 오늘 같이 보는 거지?

 응응. 너 배고파? 우리는 뭐 먹고 싶은데 고민 중이야.

 내가 사갈까?

 좋다! 근데 편의점 음식 말고 뭐 사 올만한 게 있을까?

 집 앞 호프집에서 안주 같은 거라도 사 올까?

 그런데 포장이 되나..? 그냥 동네 포차라 포장이 되는 곳 같진 않았는데.

 음 물어보지 뭐.

 가게에 포장 용기 같은 거 있나 싶어서. 용기가 있으려나?

 응! 나 용기 있어!

 아아 있대?

 응 나 물어볼 용기 있어!


 당찬 소르의 말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나와 체리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소르는 왜 우리가 웃는지 의아하다는 듯 왜냐고 물어왔다.


 아니 가게에 포장 용기 있냐고 물어본 거였어.     


 용기 있다는 소르의 말이 생각나 자꾸만 웃음이 났다. 결국, 용기 있는 소르는 포장 용기가 따로 없는 가게에서 안주를 호일에 싸 담아왔다. 우리는 거한 안주와 함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진짜 프로듀서라도 된 듯 연습생들을 평가하고 미래를 내다봤다. 그런 면에서 나는 빵점이었고 체리는 만점이었다. 체리가 고른 연습생들은 죄다 인기 상위권이 되어 결국 데뷔까지 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매력 포인트를 잘 찾아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매정했지만.

 왜 피땀 눈물 흘리는 소년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까. 일단 (너무) 잘생겼다. 어리고 키 크고 체격 좋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잘 웃고 성격 좋은 한 마디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게으르지도 않고 땀흘리며 애쓰는 모습을 나를 감동시켰다. 게다가 프로그램에는 그런 사람들이 한 명이 아니라 수두룩하게 나왔다. 그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다 함께 숙소 생활을 하며 밤새 연습을 했다. 겨우 10대 후반 - 20대 초반의 어린 친구들이 데뷔라는 꿈 하나만 바라보고 올인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부러웠다. 무슨 용기가 있어서 저렇게 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카메라를 쳐다보면서 윙크를 할 수 있는 걸까. 상상도 안 되는 좌절감을 겪고서도 다시 일어나는 저 의지는 뭘까. 친구이자 동시에 경쟁 상대인 소년들은 서로 우정을 쌓고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노력을 목격했기에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1명 중 11명이 데뷔를 하면서 프로그램은 끝이 났다. 합정역에 연습생들을 응원하는 광고가 내려가고 또 새로운 아이돌의 광고가 생겨났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소르가 프로그램에서 최애로 꼽던 친구가 자신의 곡을 부르게 된 것이다! 그녀도 프로그램 속 연습생들처럼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내 일처럼 기뻤고 어디든 자랑하고 싶었다. 마치 마지막 생방송 문자 투표에서 뽑은 그가 11등으로 뽑혔던 날처럼 괜히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나 역시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되었다. 꿈을 이루는 것이 TV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잠을 자던 중 도어락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 네 시쯤 되었을까. 소르가 집에 온 모양이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여섯 시쯤 되었을까. 체리가 집을 나선 모양이다. 어느 날 아침에는 내가 그녀들을 깨웠을지 모른다.


 다시 용기를 내어본다. 노래를 만들고, 기타를 연주하고, 글을 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서빙 일을 하면서. 그래 누군가 목격해주는 노력만큼 기쁜 게 또 있을까. 그녀들은 내 노력을 알아봐 줄 테니. 나 역시 그녀들이 한순간도 젊음을 낭비한 적 없이 매일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한다. 우리는 서로의 젊음의 목격자가 되어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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