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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해 Aug 09. 2020

뻔뻔한 댄서

코로나 19로 일을 잃고 세 달 만에 직장을 새로 구했다. 네 달 만에 받은 월급으로 제일 처음 한 것은 바로 춤 학원을 등록하는 것이다. 내가 운동으로 춤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1. k-pop 처돌이라서
2. 운동을 하는 동안 잡생각이 안 들 것 같아서
3. 승/패가 없는 운동이라서
4. 춤 잘 추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여서
5. 한 번쯤 배워보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 춤 학원을 검색했고 수강 문의를 하기 위해 연락처를 남겼다. 그리고 곧 전화가 왔다.

 - 여기 댄싱킹이에요. 문의 남겨주셔서요.
 - TV에서 보던 유명한 댄서 리아킴 같은 말투와 목소리였다. 쿨하고 시크했다.
 - 혹시 춤 배워보신 적은 있으세요?
 - 아니요.

 사실 거짓말이다. 때는 고등학생 시절, 당시에는 ‘놀토’라는 개념이 있었다. 노는 토요일이라 함은 반대로 학교 가는 토요일도 있다는 말이다. 토요일 학교에서는 CA, 일명 개발 활동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번도 원하는 것을 개발해본 적은 없었다. 가위바위보에 취약했던 나는 어울리지도 않은 꽃꽂이 라던가 공예 수업들을 들어야 했다. 그러다 3학년이 되어 영화 감상부에 지원했다가 가위바위보에 지게 되어 다른 반을 지원해야 했다. 이어 공예반을 지원했지만 거기서도 또 밀려 결국 남은 ‘재즈 댄스부’에 가게 된 것이다. 친구들에게는 투덜거렸지만 내심 설렜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을 부러워했고 나도 꼭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의 숨겨진 재능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재즈 댄스 부의 일원이 되었다.
 수업에는 강제로 온 학생들과 자진해서 온 친구들 딱 반반이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는 자세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나는 맨 뒷 줄에서 소극적인 태도로 선생님을 따라 했다. 삐-걱-삐-걱- 같은 포즈를 취해도 친구들과 나는 영 다른 느낌이었다. 집중한 표정에 비해 몸짓이 엉성하니 더 끔찍했다.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고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친구들이 이런 날 볼까 부끄럽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맨 앞 줄에 선 친구의 유려한 몸짓을 흘끗 쳐다보게 되었다. 교실에서  내가 몇 등 일지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내가 제일 못하는 사람이었다.  다들 어쩜 이렇게 잘하지? 왜 나만 못하는 거지? 나는 왜 잘하는 게 없지?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난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결국 선생님께 고3이라는 핑계를 대며 구석에서 자습을 하겠다고 했다. 교실 맨 뒤에 쪼그려 앉아 문제집을 풀면서 춤추는 친구들을 흘끗 바라봤다. 얼마나 부럽던지.  
 
- 괜찮아요. 여기 초보 분들도 많으니까 너무  쫄지 마세요!
 
 너무나 쿨한 말투에 홀린 듯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학원에서 메시지로 수업시간표를 보내왔다. 힙합, 재즈 댄스, 창작, k-pop 장르의 수업이 있었고 나는 당연히 k-pop 수업을 듣겠다고 마음먹었다. 운명처럼 이번 주 배울 곡이 평소에 좋아하던 nct127의 영웅이었다. 아, 이건 무조건 배워야지. 두근두근. 감히 설레기 시작했다.
 나는 쭈뼛거리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사방이 거울로 되어있었고 그곳엔 이미 많은 수강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거팬츠, 레깅스, 크롭탑 같은 진짜 댄서들처럼 옷을 입은 수강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집에서 잠옷으로 입던 옷을 입고 온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춤을 배우기 전에 우선 스트레칭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동작에 따라 몸을 쭉쭉 늘렸다. 마지막 다리를 쭉 찢는 자세가 잘 되지 않아 멈칫거렸고 선생님은 뒤에서 나를 꾸욱 눌러주셨다. 아악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내 비명도 낯을 가리는지 나오진 않았다. 마무리 동작까지 다 따라 하고 나서야 진짜 춤 수업이 시작되었다.

 - 두 팔을 위로 들고 스텝을 해볼게요. 오른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이렇게 발 구르면 됩니다. 해볼까요. 쓰리~ 포~
 
 선생님의 설명과 동작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두 팔을 올렸고 발을 굴렀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 오른쪽! 나는 발 조차 맞게 구르질 못했다. 다시 박자에 맞춰 두 팔을 들고 오른쪽 왼쪽 오른쪽…. 발을 구를 때마다 수강생들의 터프한 걸음 소리가 둥둥 울렸고 그 소리에 기가 죽어버렸다. 나는 소심하게 발을 동동 구르는 수준이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턱턱 자신 있게 내딛는 느낌이었다. 여기 있다던 초보자들은 다 어디에 간 걸까. 이게 초보자들이라면 나는 도대체 무슨 수준이란 말인가. 몇 번이고 선생님을 따라 해도 스텝 한 번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음악에 맞춰서 해볼까요?
 
 강렬한 인트로의 비트가 흐르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거울 속에 비친 다른 수강생들은 비장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첫박 부터 맞추면 돼. 쫄지마! 라고 속으로 외치는 나 역시 비장했다. 하지만 내 팔은 공중에서 허우적거렸고 스텝은 제대로 해내지도 못했다. 그리고 문제의 그 포인트 안무 부분. 나는 배운 대로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스텝을 밟았다. 그때 처음으로 선생님이 아닌 정면을 바라봤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과 조우했다. 그 모습은 마치. 마치. nct 사이에 낀 한 마리의 오랑우탄 같았다. 나는 내 처량한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 바로 다음 안무를 따라가지 못했다. 반복 연습을 할수록 나는 점점 더 오랑우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금 고등학생 재즈 댄스 부의 시간이 떠올랐고 나는 당연히 애석하게도 몸치였다.
 선생님이 계속해서 반복을 외치는 끝에 다섯 번에 한 번 정도는 실수 없이 안무를 따라갔다. 물론 그건 춤이 아니라 몸짓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들떴다. 음악에 따라 얼추 춤을 추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희열을 느꼈다. 막춤이 아니라 정식 춤을 추고 있는 나 자신이, 보기만 하던 춤을 직접 추고 있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업이 끝났다. 아주 간만의 운동이었다. 수업 후 선생님께 등록에 관련한 상담을 받게 되었다. 장 기간을 한 번에 결제하면 할인 혜택이 커져 한 번에 6개월을 등록했다. 과연 직장인 다운 결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nct의 영웅을 틀었다. 춤을 배우기 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들렸다. 노래와 내적 친분이 생긴 기분, 비트의 작은 소리까지 더 자세히 들렸다. 버스 창문을 열자, 땀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눈을 감고 바람과 음악을 즐겼다. 벌써 꾸준히 운동하여 탄탄해진 몸을 가진 사회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다. 놀랍게도 춤 실력은 하나도 늘지 않았다. 수업에서 내가 쟤보다는 잘하겠지의 ‘쟤’를 여전히 맡고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핑계를 대며 빼지도 않고, 맨 뒷 줄에 서지도 않는다. 되려 선생님이 잘 보이는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무려 10분 일찍 도착하는 부지런을 떨고, 모르는 부분은 질문하는 모범생이 되었다.

 나이를 먹고 ‘뻔뻔함’을 획득했다. 못하는 것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뻔뻔함, 못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뻔뻔함. 이 뻔뻔함은 다 삶을 통해 습득한 것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선생님의 동작을 보고 따라하기 바쁘다. 못하는 나를 굳이 쳐다보면서 비웃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내 몸짓이 부끄러워도 부끄러워하는 것은 나 하나뿐이라는 거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다. 그건 당연한 것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어릴 적 나는 뭐든 잘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못난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쉽지 않았다. 여전히 나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나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고, 못하는 것을 숨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천천히 인정하고 있다. 뭐든 잘할 수 없는, 못하는 나를.
 결점 역시 나의 일부분이다. 그걸 외면한 나는 온전한 나를 만날 수 없었다. 결점을 인정하고 드러냈을 때 비로소 나는 가벼워졌다. 더 이상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숨기려고 끙끙거리지 않아도 된다. 그 덕에 나는 다시 거울 앞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고,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간에는 못난 나를 마주하면서도 기쁠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을 더 잘 알고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뻔뻔한 댄서가 된 시간에는 내가 더 ‘나’ 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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