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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항수 Feb 18. 2016

시험, 별거 있나

2014. 03. 06.

교실에 들어서니 한 아이가 물었다.

"이대로 시험 봐요?"

그러고 보니 시험 대형으로 자리를 바꾼다는 걸 깜빡했다.

그런데 아이의 말을 들으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갑자기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그래, 그러자. 우리 지금 상태에서 옆과 조금 떨어뜨리고 시험을 보는 건 어때?"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상 앉아보니 괜찮았다.

시험지 걷을 때만 약간 복잡할 뿐(아이 두 명이  번호순으로 시험지를 정렬해주어 큰 불편은 없었다),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거나 소란스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시간이 부족해 짧게 하루열기를 했다.

오늘의 주제는 '선생님의 숨겨둔 아들'.

결혼도 안 했다면서 아들이 있다니.

아이들의 충격을 뒤로 하고 후원 아동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 아이의 경제적 상황과 학교에 가는 것이 꿈인 아이들의 삶을 이야기했다.

"물론 너희들이 그 아이들과 같은 마음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알아두렴.

비록 선생님은 아직 한 명밖에 도와주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더욱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


시험을 보기에 앞서 간단한 질문을 했다.

"시험은 왜 태어났을까?"

아이들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우리 실력을 알아보려고?"

"사실 시험마다 태어난 이유는 달라.

그런데 너희들이 보는 시험이 태어난 이유는 사실 너희들이 무얼 알고 모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야.

그럼 시험 문제를 맞은 것을 무얼 뜻할까?"

"안다는 거요."

"틀린 것은?"

"모르는 거요."

"그럼 틀리면 어떻게 하면 될까?"

"고쳐요."

"응.

틀렸다는 것은 모른다는 거니까 알도록 공부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 성적은 중요하지 않아."



몇 가지 주의사항과 간단한 절차를 이야기해주고 시험을 시작했다.

슥슥스슥.

십여분 조용히 연필 소리만 나더니 금방 다 풀어버린 아이들은 무척  심심해했다.

엎드려보기도 하고 몸을 배배 꼬기도 하고.

시험지 뒷장 가득 낙서를 하기도 했다.

책을 미리 준비한 애는 조용히 독서를 했다.

도저히 심심함을 못 참는 아이는 다른 아이와 서로 괴상한 표정을 나눴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참 즐겁다.

아이의 본성이 절로 나와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영어 시험은 금방 끝났다.

그러나 다른 반은 진행 중인 상황.

"(조용히) 누리보듬, 다 끝난 것 같은데 시험지 걷고 놀이할까?"

"(제법 크게) 네."

"(조용히) 다른 반은 시험 보고 있어. 조용히 할 수 있겠어?"

"(매우 조용히) 네."

"그럼 시험지 걷고 조심해서 운동장 대형으로 만들자."


책상이 움직이는 것도 모르게 대형 준비가 끝났다.

모둠별로 '침묵의 공공칠빵' 놀이를 했다.

아이들은 숨 죽여가며 웃느라 즐거우면서도  힘들어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2~3 모둠을 합쳐서 했다.

늘어난 숫자만큼 '인디안 밥'의 강도가 더 강해졌다.

시작하며 주의를 주긴 했지만

내성적인 아이는 약하게 하는 배려를 보이는 모습이 대견했다.

그러나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무지막지하게 때리더라.



마지막 시간은 '평화' 수업.

'괴롭힘의 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직접 괴롭힘 상황을 독백극으로 시연했다.

실감 나는 연기에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리 반의 '방어자'를 늘리기 위한 '멈춰 제도'를 제안했다.

아이들에게 제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줬더니 그렇게 하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지막 수업까지 끝내고 종례를 하려는데 '멈춰' 소리가 들렸다.

H와 J가 장난치는 모습을 본 Y와 K이가 나지막이 외친 것이었다.

아이들이 장난을 괴롭힘으로 착각한 것 같았지만 약속한 대로 운동장 대형으로 밀고 '평화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H의 마음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J가 장난으로 H의 밤을 빼앗으려 했는데 H는 훔치는 것으로 판단해 자기 입장에서는 치열하게 저항한 것이었다.

H는 쉽게 말도 못 꺼내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분해하였고, J는 장난이었는데 이렇게 일이 커지자  억울해하였다.


첫 회의여서 그런지 아이들은  난감해했다.

둘을 향해 몇 가지 질문도 하고, 제안도 해보지만 그들의 마음을 풀기는 어려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는 너희들이 처음이니 도와주겠다며 두 아이의 감정을 읽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진행했다.


그래도 H의 마음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H의 반응을 보니 완전히 마음이 풀리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라  내일 더 이야기 나누자 하고 집으로 보냈다.

밖으로 나가는 둘의 축 처진 어깨가 안타까웠다.


내일은 등교하자마자 둘의 기분을 풀어줘야겠다.




'괴롭힘의 원', '방어자', '멈춰' 등의 용어와 아이디어는 '평화샘 프로젝트'에서 가져왔다.

꼭 이것이 아니더라도 '학급긍정훈육'이나 '회복적 정의' 등 갈등 상황을 위한 프로그램은 무수히 많다.

이중에 어떤 것을 해도  상관없고, 자신이 직접 만들어도 좋다.

아이들에게 갈등을 예방하고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 힘을 길러줘야 한다.


사람이 둘만 모여도 갈등은 필연적이다.

갈등 없는 교실은 환상에 불과하다.

만약에 갈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누군가가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건강한 집단은 갈등이 없는 집단이 아니라, 갈등을 잘 해결하며 성장하는 집단이다.


다채로운 아이들이 서로 다투기도 하고 힘을 합쳐보기도 해야 삶의 다양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호기롭게 제목을 시험이 별 거 아니라는 투로 적었다.

사실 그렇지 않다.

이날 본 시험은 진단평가다.

아이들이 어떤 수준인지를 알기 위한 평가다.

 교사 재량에 따라 가정에 성적을 알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평화로웠을 뿐이다.


시험에 대한 설명이 아이들에게 와 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겪는 현실-성적에 따라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그저 지금의 시험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영향을 덜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다.


지역마다 학교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여전히 많은 경우 평가는 교사의 권한 밖이다.

교사가 시험 문제를 낸다고 자유로운 건 아니다.

여전히 다른 반 눈치, 관리자 눈치, 교과서 눈치를 봐야 한다.

심지어 내가 근무한 지역은 도교육청에서 문제은행을 각 학교로 보내준다.

결국 시험 결과는 교과서 안의 박제된 지식을 누가누가 잘 외웠나로 판별 난다.


이날 평가 결과로도 몇 명의 아이들 머리 위엔 부진아 딱지가 붙여졌다.

과연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평가하고 있는가.

평가는 누굴 위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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