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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항수 Feb 18. 2016

교실에 평화가 깃들기를

2014. 03. 07.

학습도우미(반장, 부반장 제도의 변형)를 선출하는 시간.

아이들에게 학습도우미의 역할이 뭐냐고 물었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때 아이들을 조용히 시킵니다."

"선생님을 도와 일을 합니다."

"다른 친구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학습도우미가 조용히 시킬 때 기분이 어떤데?"

"자기는 조용하지 않으면서 내 이름 적으니 짜증 나요!"

"우리는 책임에 따라 선생님이 없을 때도 활동을 할 테니 누군가 조용히 시킬 필요는 없겠다. 그치?"

"그러네요."


"우리가 일주일 동안 있으면서 선생님을 돕는 사람이 없었니?"

"많이 있었어요."

"앞으로도 원하는 친구가 선생님을 도우면 되지 않겠니?"

"네!"


"모범을 보이라고 하면 기분이 어땠어?"

"학습도우미라고 하면서 이것저것 시키고 놀리고. 정말 싫었어요."

"많이 부담됐겠네. 그럼 이것도 별로다."


"그럼 학습도우미가 어떤 역할을 맡으면 좋을까?"

"친구들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어려운 친구가 있을 때 옆에서 도와줍니다."

"우리 반에 일이 생기면 돕습니다."



우리 반을 위해 힘써줄 수 있는 친구는 손 들어 달라고 하니 아무도 들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부담이 가는 것과 친구들이 잘난 체 한다고 할까 봐 걱정인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테지.


"학습도우미를 하는 것은 여러분의 권리예요.

부모님에게 부담 가도록 하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교통 봉사도 여러분들이 직접 서면 돼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 나눠서 알겠지만, 학습도우미가 잘난  척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겠죠?

우리 반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것이니 걱정 마요."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하나씩 손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열 명이 되었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


후보자 기호 선정을 마치고 소견 발표를 하였다.

발표를 들은 아이들은 궁금한 점을 묻고, 앞으로 어떤 자세로 학습도우미에 임할 지도 물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정과 비밀의 원칙에 대한 선서를 시작으로 투표가 시작됐다.

개표를 하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습에 아이들이 열광했다.


다섯 명의 학습도우미는 결정이 됐는데 마지막 여섯 번째가 같은 수의 표가 나왔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동수표를 받은 후보끼리 합의하면 어떻겠냐는 대답이 나왔다.

두 후보의 의향을 물어보니 재투표를 하겠다고 하였다.


재투표까지 마친 끝에 한 학기 동안 우리 반을 위해 힘써 줄 여섯 명의 학습도우미가 선출되었다.

그들을 향해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다음 시간은 평화 수업.

네 번의 역할극이 필요해서 하고 싶은 아이들을 모집했다.

모두 열여섯 명이 아이들이 중간놀이 시간을 반납하고 역할극 연습에 몰입했다.

나는 대본을 나눠주고 몇 가지 주의사항만 안내하였다.

이후에 아이들 스스로 역할 배분과 연습까지 끝냈다.

(첫 역할극이었음에도 수준이 나쁘지 않았다.

반응이 괜찮은 걸 보니 올해는 꾸준히 연극을 해야겠다.)



따돌림 상황의 역할극을 보며 아이들은 감정 이입을 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괴롭힐 때,

한 명의 방어자가 있을 때,

세 명의 방어자가 있을 때,

모두가 방어자가 될 때.

네 번에 걸쳐 역할극을 진행하고, 역할에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J의 상황을 공유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친구가 J와 앉기 싫었다는 것은 J의 오해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때 J가 정말 기분 나빴던 이유가 한 시간 동안 누구도 J에게 말을 걸지 않은 것임을 강조했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J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니 S가 다가가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도 J가 꿈쩍하지 않자 나는 J에게 다가가 마음을 달랬다.

다행히 금세 마음이 풀려 아이들과 어울려 지냈다.


마지막 약속은 내가 아이들 앞에서 선언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손을 들고 내 명예를 걸고 반드시 지킬 것임을 맹세했다.

-나는 체벌하지 않겠다.

-나는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들을 보면 반드시 돕겠다.

-나는 혼자 있는 학생들을 돕겠다.

-나는 괴롭힘 문제를 학생들이 알려올 때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


오늘까지 총 네 가지 평화 약속이 정해졌다.

1. 우리는 괴롭힘 상황에서 서로를 도울 것이다.

2. 우리는 괴롭힘이 있을 때 서로에게 알릴 것이다.

3. 우리는 혼자 있는 친구들과 함께 할 것이다.

4. 선생님은 평화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 약속이 우리가 서로 아끼며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길.


일주일의 마지막은 함께 회의하는 시간이다.

그동안 불편했던 점, 새롭게 하고 싶은 것, 그 외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두 가지 안건이 나왔다.

중간놀이 시간에 강제로 교실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에 대한 불만.

교실 앞 액자의 문구를 바꾸자는 제안.


중간놀이 시간에 대한 불편한 점을 말하게 했더니 밖에 나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어 내가 처음에 그 규칙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다.

건강, 성장, 함께 노는 경험.


아이들 역시 필요성을 충분히 느낀 것 같아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희들이 아직 함께 노는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가 가장 큰 것 같으니 당분간 선생님과 함께 중간놀이 시간마다 놀이를 해보는 것은 어때?"

환호성이 일더니 만장일치로 의견이 채택되었다.

액자의 문구는 시간이 부족해 공모를 통해 정하기로 했다.


종례 시간에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한다고 했더니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된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미안. 사실 나는 조금 부담스럽긴 해.

하지만 나 역시 기대되는 건 마찬가지야.

다음 주도 행복하게.


*평화수업은 서울평화샘모임에서 정리한 내용을 참고하여 진행하였음을 밝힙니다.




우리 사회는 민주적이며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가.

학교만 보아도 답이 나온다.

당시 이 학교는 '학습도우미'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반장과 비슷한 이 역할을 학급당 6명이나 선출한다.

도대체 왜?

아침 등굣길, 아이들의 안전을 돌볼 어른이 필요한데 사람은 없고, 그래서 학습도우미의 부모가 의무적으로 그 일을 맡는 것이 관습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따라서 아이가 학습도우미를 한다는 말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침에 교통봉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학급과 학교의 여러 가지 일을 위해 돈과 품을 내기도 한다.

여유가 있는 부모가 아니면 이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아이들은 1, 2학년 때부터 이런 사실을 체득한다.

그래서 3학년 정도만 되어도 학습도우미를 할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로 나뉜다.

아이들도 이를 잘 알고 있고, 교사 역시 인수인계를 할 때 이를 고려한다.

아이들은 수업에서 언급되는 '민주'와 '기회의 평등'이란 책에서만 있는 말인 걸 어려서부터 배운다.


교사 전체회의에서도 이 불합리함에 대해 몇 차례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내가 학교를 떠날 때까지 바뀐 것은 없었다.

학교에서는 보이지 않는 관습보다는 글자와 숫자로 나타나는 행정업무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화 수업에 공을 들인 만큼 효과가 있었을까?

단순히 있다 없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한 번 수업을 한다고 해서 이제껏 아이들이 겪은 경험이 재구성되기는 어려우니까.

이후에도 꾸준히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토의하고 반성하는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한다.


항상 염두해둘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일 년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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