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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항수 May 02. 2016

아이들만큼 나도 불안하다

2014. 5. 19.

시험 D-1


교실로 들어서니 S가 심각한 얼굴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주변에서 떠드는 아이들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곳곳에서 아이들이 날이 선 징후가 보였다.

평소보다 더욱 활기찬 것도 긴장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어린 나이에 '시험' 때문에 며칠 씩이나 불안에 떠는 아이들에게 내가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무력하고 무력하다.

아이들은 시험 결과에 불안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마음이 다칠까 불안하다.

아픈 마음에 '시험'과 '공부'를 똑같이 보고 배움의 즐거움을 저버릴까 불안하다.

우리의 삶을 시험 점수로만 평가하는 사람들이 '역시!' 하고 눈을 흘기며 폄훼할까 불안하다.

아이들의 불안과 나의 불안이 만나 하나의 합의안을 만든다.


시험 연습.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과목을 선택하고, 연습을 했다.

여기서 '스스로'는, 사회의 굴레 안에서 어쩔 수 없는 '스스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스스로'라고 칭하지만 '스스로'가 아닌 것이다.

나는 허울 좋게 자율적으로 보이는 말로 포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 허울 좋은 말도 아이들의 본성을 따르면 두 시간도 힘들다.

그걸 알면서도 아직 연습하는 친구가 있다는 핑계로 한 시간 더 조용히 하도록 했다.


이럴 때면 나 자신이 너무 추해 보인다. 

그래서 시험기간만 되면 몸과 마음의 상태가 엉망이 되고 생활이 흐트러지나 보다.

말과 행동, 마음과 신념의 불일치!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쉼표가 필요해 마지막은 피구로 장식했다.

아이들은 '우린 살아있다'며 온몸으로 외쳤다.

아무리 사회가 꾹꾹 누른다 하여도 우리, 아직 살아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추가.

왜 연습이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 적는다.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지 않냐는 논리를 지니면 충분히 나올 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토론의 절차에 대해서 어떤 단계가 있는가?

분수의 덧셈과 뺄셈, 곱셈을 능숙하게 하는가?

유물 사진만 보고 어느 시대의 것인지,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가?

초승달, 그믐달의 차이와 그것들이 음력 며칠에 어느 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지 알고 있는가?


적어도 내가 근무하는 지역은 저런 것들을 모르면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암기하지 못하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가거나 배우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굳이 외우게 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면서도 내가 아이들에게 시험연습을 하도록 시간을 주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태도다.

그렇기에 아픈 것이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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