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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토끼 Jun 16. 2023

경험은 새로운 눈을 갖게 만든다.

어느 날 엄마가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내 뒷모습을 카메라로 찍어주던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서 있는 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내 걸음걸이가 이상한가? 한 달 전 유럽 여행을 다녀오면서 다리를 삐끗하긴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욱신거리던 게 사라져서 별생각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고, 그 병원에서는 사진을 찍어 보더니 어서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내 다리에서는 주먹만 한 혹이 발견되었다. 갑자기 결정된 수술은 그렇지 않아도 개복치인 나를 겁먹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떤 혹인지 몰라서, 일단 수술을 한 후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아픈 사람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열심히 했다. 네이버 검색창에 내 병명 검색하기. 의료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포인트를 위해 달아 둔 실용적이지 못한 댓글들을 읽으면서 나의 두려움을 더욱 커졌다. 암이면 어떻게 하지?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하면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아직 젊은데(당시 나는 25살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나는 나쁜 짓하고 살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수술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나는 실체 없는 공포와 절망감 때문에 많이 울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조직검사 결과에도 이상이 없었다. 그냥 혹이었다. 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혹.

혹을 제거한 후 근육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수술 후 처음으로 재활치료를 하는 날, 치료사 선생님은 누워서 다리를 들어 올려 보라고 했다. 머리로는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데, 내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물이 났고 서러웠고, 또 무서웠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잘 다독여 주면서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근육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는 누구든 시간이 걸리니까,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고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어느 정도 재활치료가 끝난 후 퇴원한 나는 이후에 한 달 정도 목발을 짚고 생활해야 했다.​


이때 나는 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외출 자체가 내게 큰 도전이었다. 집에서 학원이 있는 동네까지 이동하려면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 했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것 자체부터가 큰일이었는데, 사실 더 큰 복병은 지하철을 타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환승하려고 하니, 여러 개의 출입구 중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은 단 한 군데였다. 원래는 바로 내려가던 계단을 이용하지 못하고 길을 건너고 한참을 걸어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지하철에서 내린 후에도 나는 또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야 했다. 학원과 가까운 출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제일 끄트머리 출구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래도 학원이 있는 도로 방향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고비는 학원 정문. 손잡이가 없는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같은 반 친구의 도움으로 낑낑대며 올라갔는데 너무 힘들고 무서웠다. 이러다가 남은 다리 하나도 분질러버리겠는데... 나중에 경비아저씨가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가르쳐주셔서, 남은 몇 주는 다행히도 가파른 정문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강의실로 갈 수 있었다. 평소에 40분이면 가는 학원을, 나는 이날 2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고작 한 달 이렇게 지내는데도 힘들고 화가 나는데, 그들은 어떤 심정일까.​



나밖에 모르던 20대 중반의 나는 다리의 혹을 떼어 내면서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 그 공간에 작은 씨앗을 심었다. 평소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다르게 보였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어졌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행동하고 싶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보자는 생각에 장애인을 위한 사진 교육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 해 한 해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내 카메라에도 그들의 렌즈가 끼워지기 시작했다.


​​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 동네에 있는 장애인복지시설에 봉사활동을 하러 다녔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한 번은 엄마를 따라가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누워 있는 내 또래의 장애아동의 몸을 닦아 주는 엄마의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당시 나는 엄마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왜 나랑 놀아주지 않고 모르는 아이의 몸을 닦아주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경험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했던 (이기적인) 나는 여전히 그들과는 다른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겠지만, 조금 더 이해하고 연대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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