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조종사가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의 그림을 보여주었을 때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밖을 그리든 안을 그리든 제발 뱀 그림 따위는 그만 그리고, 지리와 역사와 산수와 국어를 공부하는 게 좋겠다.” 이런 세상에. 얼마 전 나도 똑같은 말을 했다.
졸업사진 콘셉트를 영화 <이티>로 정한 고3 햇님이가 이티 인형을 만들어 달란다. 뭐하러 그렇게 어려운 걸 하느냐 다른 콘셉트를 찾아보라 조언했으나 막무가내다. 제 용돈으로 중고마켓에서 녹슨 중고 자전거와 빨간색 후드티까지 구입한 후 엄마가 인형을 만들어 주지 않겠다 하니 주말에 기숙사에서 나와 이티를 만들러 집에 오겠단다.
주말마다 집을 찾는 아이. 집에 오면 아주 그냥 푹 쉬는 아이. 이번 주말엔 학교에 잔류하며 공부 좀 하는가 했건만 이티 때문에 또 집에 온다니. 엄마가 만들어 줄 테니 기다리라 하고 입지 않는 황토색 치마를 잘라 급히 이티를 만들어 사진을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제발) 이제 졸업사진 따위는 그만 생각하고.. (수능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
<어린 왕자> 속 철도원이 말한다. “아이들만이 창유리에 코를 바짝 밀어붙이고 있지.”어린 왕자가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헝겊 인형을 가지고 노는 데에 시간을 보내고, 그 인형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지요.”
-졸업사진을 왜 대충 찍어야 하지요?
-고3이니까, 수능 공부를 해야지.
-수능 공부를 왜 해야 하죠?
-수능시험을 잘 봐야 가고 싶은 대학에 갈 수 있으니까.
-가고 싶은 대학에 가는 게 왜 중요해요?
-그래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지금 하면 안 되나요?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떠나 만났던 이상한 어른들을 보며 나는 다르다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다. 나는 그들과 별다를 것 없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어린 왕자> 책을 펴는 순간 우리는 다시 놓치고 있었던 중요한 가치를 다시 찾아내게 한다. 그것이 <어린 왕자>가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팔리고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아이에게서 인터파크 티켓 링크가 톡으로 왔다. 얼마 전 콘서트장 앞까지 다녀왔는데 설마 또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긴장하며 “??”를 보내 동태를 살폈다. 곧 “가고 싶다”라고 답장이 왔다. <어린 왕자> 할아버지가 오셔도 ‘다녀와’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 한 거 아냐? 양심이 없네’ 마음의 소리를 감추고 “가고 싶겠네”하고 일단 공감해줬다. “하성운 나와. 하성운 왜 나 수능 끝나면 군대 가지”, “그렇군 ㅠㅠ”라 답장 후 가슴을 쓸어내리며 급히 화재를 돌렸다.
매번 나를 시험대에 세우는 아이다. 지금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몰라. 불안은 나를 다시 어른으로 만든다. 어른이 된 나를 인정하자. 이럴까 저럴까 그렇게 흔들리면서 살자. 그리고 가끔 <어린 왕자>를 읽으며 한쪽으로 기울었던 내 마음을 비춰보며 잊고 지냈던 가치를 찾자.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겨두었기 때문이야’ 한구절도 빠뜨리고 싶지 않은 이 아름다운 책을 오늘도 흔들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한때 어린이였던 모든 어른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