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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생각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서평: Blooadland. 피에 젖은 땅.

by 송다니엘

내가 20세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


역사가 현실을 비추는 거울임을 넘어, 현재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확정된 시기이자 현재는 그것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즉 그 이후의 사회는 더 이상의 혁명, 모든 것을 바꿀 만한 전쟁은 없었다는 점. 계층을 올라가는 사다리는 없어진 지 오래가 되어 버린 지금 이 시점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본능적으로 끌렸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중에서도 작금의 21세기를 만드는 데 제일 큰 역할을 한 2차세계대전. 이에 대한 독서는 그 무엇보다 내겐 제일 중요한 ‘인생공부’임이 분명했다. 내가 처음 접했던 건 처칠의 2차세계대전. 이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 덩케르크의 영향이 컸다.


처칠의 자전적인 책이기도 한 그 책은, 연합국 측면에서 서술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사관이다. 물론 전쟁의 참혹함이 없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전쟁의 전략적인 측면에 대한 고찰, 전쟁 이후의 세계 체제. 해양력의 중요성 등. 이후 다루게 될 내용에 비하면 전쟁의 ‘순한 맛’ 정도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마치 전쟁이 정말 참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독소 전쟁의 현장인 동부 전선에 비하면 비할 것도 아니다. 이는 그동안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영화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제네바 협약, 즉 포로의 인권은 온데간데 없고 민간인을 포함한 거대한 살육의 현장. 동부 폴란드에서 우크라니아에 이르는 공간에서 10여년 간 1400만명이 학살됐다. 600만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우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보며 나치의 잔혹함에 대해 성토하지만 이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의도된 기근과 민간인 학살, 사회 엘리트 계층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은 인간이 얼마만큼 악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 모든 시작은 1933년 스탈린의 의도된 우크라이나 대기근. 신생국가이자 산업화가 되지 않은 소련은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본인 정권 유지 및 정적제거를 위해 의도적인 기근을 벌이고, 결국은 수백만을 죽음으로 내몬다.


“숙청은 스탈린 정책의 핵심이었다. 내무인민위원회로 당을 견제하고 당으로 내무인민위원회를 견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소련의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폭군이 자신의 궁궐에서 정치를 쥐고 흔드는 것으로 권력을 증명하는 폭군정치가 되었다.”


결국 수백만을 실험으로 한 농업 집단화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이를 계급투쟁으로 연결 지었으며, 수많은 사람을 강제 이주시켜 노동을 시켰고, 이는 결국 이후 독소 전쟁 때 페널티로 돌아온다. 그리고 만인의 노동자를 위한 국가는 스탈린에 이르러 민족주의적으로 변해, 어느새 소비에트 연합은 스탈린의 러시아 제국처럼 변했다. ‘인민에 대한 동지애’라는 사회주의의 기본 전제를 폐기해버렸다.


“인민전선 시대에, 소련의 대외적 영향력은 관용적인 이미지가 핵심이었다.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가 부상하던 유럽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린치가 성행하던 남부인들이 있던 미국에서, 모스크바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는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 다문화 국가’라는 이미지였다.”


2차 대전의 시발점이 된 폴란드 침공에 대해 빼놓을 수 없다. 흔히 영미권의 시각(처칠의 사관 포함)으로 보면, 독일이 체코를 병합하고, 마침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모든 전쟁의 원흉을 나치 정권이라고 본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소련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중요한 점은, 독소 불가침 조약 이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선을 중심으로 폴란드를 침공한 사실이다.


히틀러는 결국 소련과 이념 때문이라도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스탈린도 언젠가는 독일과의 일전을 준비하긴 했지만, 그들은 합심해 상대적으로 약한 폴란드를 함께 침공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가장 취약하던 시기에 독일의 땅을 빼앗고, 소련의 침공을 막아내며 소련으로부터 이득을 취한 폴란드는 두 나라 모두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으니.


이후, 동부 폴란드에서의 소련의 폴란드에 벌인 학살은 또 역사는 배제해왔다.

이는 소련이 결국 승전국이었으니까.


나치 제국은 프랑스를 손쉽게 제압하고, 영국과의 일전을 준비하다가 이를 포기하고 소련 침공으로 전쟁의 가닥을 잡는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이것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집단화가 감추고 있는 비밀은 (이미 오래 전 스탈린이 적었듯이) 그것이 바로 팽창적 식민지 건설의 대체물, 다시 말해 내부로의 식민화 작업에 해당됐다는 사실이다. 스탈린과 달리 히틀러는 여전히 외부로의 팽창을 통해서만 식민지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봤으며, 그의 머릿속에는 소련 서부의 거대한 농업지대에 더해 캅카스 지역의 석유 매장 지역까지 그려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경제 자립도가 높은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영국을 쓰러뜨려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소련은 반드시 쓰러뜨려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했으나, 나폴레옹처럼 모스크바까지 진군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결국 전쟁의 주도권을 잃는다. 나치 제국은 최초에 계획했던 마지막 해결책, 즉 우랄 산맥 동쪽으로 유대인을 강제 이주하려는 정책이 실패하자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는 집단학살이다. 그전에도 서부전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극악무도함을 보였던 독일군과 친위대, 아인자츠그루펜이지만 결코 그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은 강제수용소를 만들고, 집단학살을 시작했고 이에 대한 수단 중의 하나가 가스실이다.


때때로 독일군은 노동력이 부족할 때마다 전쟁포로와 유대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식량이 부족할 때는 가차 없이 학살했고 인간을 철저히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애초에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니 학살의 당사자는 죄책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1400만명이 죽은 그 현장에서 그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개개인의 삶에도 주목하려고 노력한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70여년 전 일이 우리에겐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역사를 유대인 학살을 한 것이 나치의 만행이었다고 인식하는 것처럼 단편적인 사실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실제의 역사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이다. 독일만이 악했다고 할 수 있는가. 소련의 만행에 대해 눈 감고 있었던 미국과 영국은 그렇지 않았는가.


전쟁이 지난 지금에서야 인권이 신장하였고, 더욱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의 정도에 따라 계층은 뚜렷해지며 계층 간의 사다리는 실질적으로 없어졌다. 언뜻 생각해보면 인터넷의 보급으로 자유로운 의사개진과 수평적인 사회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회의 여러 모습에서 극단적인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으며, 이 끝이 반세기 전에 있었던 광기에 모습이 되거나 못 해도 비슷한 모습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우려스럽다.


우리가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점에 있다. 그 광기가 이어지지 않게 하려고. 1400만명의 희생보다 더 큰 희생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하려고 구성원들이 의식을 가져야 하는 점이다. 비판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저지른 수많은 학살에 우리는 그래서 주목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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