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한산. 영화가 개봉한 지 2주째. 누적 관객이 500만명이다. 아마 천만까지도 가능하리라 싶다.
독일에 있느라 보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 대신 충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충무공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임진년(1592) 1월 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심지어 전사하기 이틀 전인 무술년(1598) 11월 17일까지 7년간 일기를 썼다. 부득이 출정하거나 사정이 있는 날은 빼더라도 상황이 주어지면 틈나는 대로 적었다.
난중일기에 적혀있는 이순신의 주된 일과.
- 술을 먹는다. 활을 쏜다. 바둑, 장기 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등등.
또 일기를 보면, 충무공은 거북선 등 전선 제조 및 여러 무기 개발에 직접 신경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수군뿐만 아니라 육군 등과의 유기적인 협조, 명나라 군사와의 연합작전까지. 단순히 작전사령관(군령)의 역할뿐만 아니라, 참모총장(군정), 그리고 넘어서 지금으로 치면 합동참모본부, 연합사의 작전까지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공문서 작성까지 본인이 직접 하는 모습을 보면 몸이 열 개라도 다 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랬기에 항상 가족들의 안위에 걱정을 하면서도 실제로 갈 수 없었고, 어머니의 임종, 아들의 사망을 막을 수 없었다.
가족에 대한 걱정과 가족을 잃은 슬픔. 절절하다.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 없다.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길에서 바라보면서 가슴 찢어지는 비통함을 모두 적을 수가 없었다.”
“면(아들)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처럼 인자하지 못한 것인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육식을 하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걱정거리로 여긴다고 한다. 개인 사정이 비록 간절하긴 하나 나랏일이 한창 다급하다. 왕명서와 함께 고기음식을 하사하셨으니, 더욱 더 마음이 비통하였다.”
군인, 특히 지휘관이 혹여 평소에 할 일이 없더라도 꼭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충무공의 삶을 보면서 새삼 느낀다. 충무공은 매번 아랫사람을 시켜 가족들을 대피시키고 안부를 묻는다.
이런 그에게 외로운 지휘관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성룡이 만약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충무공도 사람인지라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지금으로 치면 매우 현명하고 까다로운 지휘관인지라 기준이 굉장히 높은 사람임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군율을 어기는 자는 어김없이 곤장 혹은 심할 경우에는 처형. 뭐니뭐니해도 그를 제일 힘들게 한 사람은 원균이었음에 분명하다.
아래는 원균에 대한 이야기 중 일부이다.
“적을 토벌하는 일을 의논하는데, 원균이 하는 말은 지극히 흉측하고 거짓되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함께 하는 일에 후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의논하는 사이에 원균이 하는 말은 매번 모순이 되니, 참으로 가소롭다.”
“영남수사(원균)는 복병군을 동시에 보내어 복병시키기로 약속하고 먼저 보냈다고 한다. 매우 해괴한 일이다.”
“말하는 사이 원균에게 흉포하고 패악한 일이 많은 그의 거짓된 짓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원균이 술을 마시고 하기에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포하고 패악한 말을 함부로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하였다. 흉악하다고 말할만하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다 내보내고 다만 7,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하는 일이 대개 이와 같다.”
“원균이 데리고 온 하급관리를 곡식을 교역한다고 구실삼아 육지에 보내놓고 그 아내를 사통하려 하였는데, 그 여인이 발악하여 따르지 않고 밖으로 나와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본인의 상관 및 당시 중앙 관리, 혹은 현 실태에 대한 한탄도 굉장히 많이 볼 수 있다. 조직 내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절망. 특히, 공감되는 부분은 전문가 즉, 현장에 있는 사람을 믿지 못해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이다. 사람 사는 게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도원수(권율)의 군관이 삼도에 있는 적의 형세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군관과 하급 관리를 잡아다가 조사할 일로 진영에 왔다. 매우 우습다.”
“원수의 장계와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녕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눌러앉을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우스운 일이다. 조정에서 계책을 세움이 이럴수가 있는가. 체찰사가 계책을 내놓은 것이 이처럼 제대로 된 것이 없단 말인가. 나라의 일이 이러하니 어찌할 것인가.”
임진년 초기부터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충무공은 대단한 전투를 담백하게 적었다.
4월 14일 임진왜란 발발. 5월 7일부터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연전연승. 한산도 대첩, 그리고 적의 본진을 쳐들어가 개 박살 내버리니, 왜군은 이순신을 두려워하여 항전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렇게 제해권을 확보하여 장기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한편, 이순신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존경받는 위인인 이유는 임진년의 승리에 그치지 않고, 수군이 궤멸한 상태에서 패잔병을 수습하여 명량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노량해전에서 7년간의 전쟁을 끝낸 것에 있다. 그는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이를 모두 이겨냈다.
그렇기에 난중일기에서도 제일 극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부분이 정유년 일기이기도 하다.
정유년. 적의 간계임을 알고 왕명을 거역한 이순신은 파직되고, 3월 4일 투옥, 4월 1일 석방되었다. 이날부터 복직되기까지 120일간의 백의종군 여정에 오른다.
누명으로 인한 투옥, 출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죽음, 백의종군 중 수군의 궤멸, 다시 통제사로의 복귀, 명량해전, 아들의 죽음, 그리고 전선을 재정비하여 이듬해 노량해전.
출소부터 명량해전까지의 이동경로는 아래와 같다.
* 경로: 인덕원–평택–오산-아산(모친 사망)-천안-공주-논산–여산(익산)-삼례–전주-임실– 남원–승주-구례–송치(순천)-악양(하동)-산청(칠천량 패전)
* 합천-하동-사천-노량–하동–구례–순천–보성–장흥(배설에게 배 인계 받음)-해남으로 이동 (명량해전)
몇가지 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투옥 후, 백의종군 당시.
“심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7.16. 칠천량 해전 이후.
“우리나라에서 믿는 것은 오직 수군에 있는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다시는 가망이 없을 것이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한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얼마 뒤 원수(권율)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수없다.”고 하면서. 나는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매우 기뻐하였다.“
9. 16. 명량해전 당일.
”망 보는 군사가 와서 보고하기를 “2백여척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치고 있는 곳으로 향해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이 홀로 적선 가운데로 들어가 탄환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발사했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격하지 않아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로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배를 곧바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라.”고 말했다.”
“초요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안위의 배도 왔다. “안위야 감히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간들 살 것 같으냐?”라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과 교전하는 사이에 들어가니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배가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 쪽으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결사적으로 난격하고 내가 탄 배위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난사하여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31척도 격파되니 여러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天幸)한 일이었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의 일이다. 당연하게도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순신이 전투 전 배 위에서 하늘에 기도하기를, ”이 원수를 제거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자, 홀연히 바다 가운데로 큰 별이 떨어졌다. 이순신이 탄환을 맞았다. 이 때 이순신은 ”전쟁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나의 죽음을 말리 하지 말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
사실 내가 꼽는 이순신이 위대한 이유는 싸우기 전에 미리 이길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 그보다 더 위대한 이유는 본인이 생각해도 이기는 것이 천행이었다고 표현할만한 전투를 이겨냈다는 점. 그것이 그를 불멸의 자리로 만들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사실을 난중일기를 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한편, 역사를 전공하는 선배님께서는 원균의 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조선시대에 지위라는 건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닌데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길 정도면 원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별 볼일 없는' 관료는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는 기록이 말하는 것이자 기억으로 전승되는 거라 '실제'와는 다를 수도.”
‘네가 수양록에 가입교 소대장 욕을 썼다고 그 소대장이 나쁜 사람이 아닌 것처럼’이라는 재미있는 비유를 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