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그리스인 이야기
15년도 철없으면서도 스스로 세상을 알만큼 알고 있다고 착각하던 사관생도 시절. 상해, 태국 싸타힙, 인도 첸나이, 사우디 제다를 거쳐. 홍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건너갈 때를 다시 회상해본다.
항해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꽤 긴 시간을 통과하는 운하를 보면서 현대 문명의 이기에 감탄하면서도 평소에 잘 접해보지도 못했고, 그저 책으로도 얄팍하게만 접하고 있던 세계의 관문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설렜던, 그러면서도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배우겠다는 의지와 호기심으로 똘똘 뭉쳤던 기억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더욱 사관생도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물론, 지금 내가 당직사관의 위치로 그곳에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교육생의 신분으로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다.
각설. 무뚝뚝하고, 다소 거만한(?) 도선사의 안내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다. 홍해를 건너 마주한 지중해. 사우디의 찌는 듯한 더위와 메르스를 피해 이집트를 도착한 것만으로도 좋았다. 물론, 당시 테러의 위협에 이집트에 와서 그 유명한 피라미드도 못 보고 쇼핑몰에 갇혀있다며 불평불만하기도 했으나 그 나름대로도 좋았다.
그리고 항구, 도시의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그리하여 이제 알렉산드로스, 그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에 앞서 그리스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해보자 한다. 그리스. 우리 세대라면 모두가 아는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 초등학교 도서관의 드문 인기 서적으로 꽤나 많은 친구들이 돌려보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하여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읽지 않았어도 모두들 어느 정도는 트로이목마, 제우스,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등의 인물에 대해 알고 있을 테다. 나 또한 그러하다.
한편, 인내심을 가지고 로마인이야기를 완독한 사람, 혹은 중도 포기했더라도 그 책을 접했던 사람은 그 이야기의 방대함, 울림에 대해 공감할 거라고 생각한다. 14권에 이르는 시리즈에 비해 그리스인 이야기는 3권에 불과(?)해서 상대적으로 도전해볼 법 직하다.
1. 현대 민주주의, 리더에 대한 고찰
산지가 많고 비옥한 땅이 적어 오랜 세월 사람의 생각과 행동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자연환경이 우리 민족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 그리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그리스는 수많은 도시국가로 산재되어 있었고 그중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주축이었다.
스파르타가 시민의 수 즉, 특권계층을 제한하는 등 폐쇄된 사회였다면, 아테네는 시민의 수를 늘리기 위해 시민 간의 계급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강력한 해군력, 자유로운 통상 활동을 통한 자본의 축적, 무엇보다 개방적인 정치체제로 대표되는 아테네는 당시 페르시아의 두 차례 전쟁 이후 패권국가가 되었다.
역사상 그토록 넓은 영토를 지배한 나라는 없다고 생각한 페르시아와 시도 때도 서로 치고받던 도시국가들과의 전쟁은 어떻게 후자의 승리로 끝났을까.
대부분이 용병으로 구성된 페르시아와 각자의 자산(계급)에 따라 수행하는 직무는 달랐지만 모두가 이를 ‘피의 세금’으로 여겨 모두 병역의 의무를 다한 그리스와는 단지 숫자로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또한, 서로의 정치적 입장이 다르더라도 전쟁 중에는 정치적 견해, 각 도시국가 간의 이해를 접어두고 서로 뭉쳤다. 특히 아테네는 10명의 ‘스트라테고스’가 있었지만, 전쟁 중에는 단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지휘체계 일원화를 이뤄냈다. 이것 또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이를 이끈 건 평범한 이가 아니라 테미스토클레스였다. 모두가 평화를 외치고, 육상에서의 전투만 생각할 때 남다른 혜안을 가지고 해군력 증강을 이뤄낸 그를 보면서, 여기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여실히 느낀다.
“국정방향은 엘리트가 생각해서 제안하고 시민에게 그 찬반을 맡긴다.”
이후, 30여년간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페리클레스의 선정 아래 패권을 유지한 아테네는, 리더의 부재와 선동가의 대두 등으로 장기적인 계획의 실종, 불필요한 전쟁과 패전, 국고의 낭비 등으로 빠르게 망가졌다. 아테네가 패권을 잃은 건 물리적으로 스파르타에게 져서라기보다는 국내정치의 혼란과 실정에 의한 결과였다.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아테네는, 그에 대한 반면교사의 예가 되기도 한다. 이는 아래와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Demokratia(민주주의), Demagogia(선동), 두 가지 모두 대중(demos)가 주역이다.”
“많은 사람의 두뇌를 유도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 유도하는 사람의 존재 이유도 인정하지 않은 지 오래된 아테네인에게 민주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무거운 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긴박한 상황에 놓이면 일반 시민은 원래부터 부족했던 냉정함을 완전히 잃기 십상이다. 인간은 자신감에 차 있으면 평정한 마음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반대로 불안하거나 분노를 품으면 판단도 극단적으로 동요한다. 그러면 민주정치는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한편, 아테네 이후 패권을 쥔 스파르타는 군사강국이었지만 이를 유지할 정치체제, 문화, 문명, 경제체제 등이 없었다. 그렇게 그리스는 본인들이 페르시아를 어렵게 이겨 쟁취한 에게해의 제해권,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패권을 잃었다.
“스스로 위험부담은 떠안지 않는 존재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스파르타만의 제도는 결함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기를, 그것이 항상 적용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테네, 스파르타, 다른 도시국가의 전성기는 정치체제를 떠나 한 명의 현명한 지도자가 있었을 때이다.
2. 알렉산드로스
그는 13살부터 만 3년간 스파르타식 군사교육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아테네식 교육을 받았다. 또, 아버지가 수많은 전쟁으로 나라를 비운 1년간 이미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여 국가를 이끌었다. 18살, 사령관이라 불리는 지위에 있지도 않았던 그는 첫 출전에서 필마단기로 그리스 도시국가와의 전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20살 약관의 나이로 그리스 세계 중 변방이었던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한 그는, 그에게 반기를 들던 그리스 도시국가를 제압한 후에, 그리스 연합군으로 동방원정을 떠난다. 그는 아버지 필리포스가 물려준 군사력에, 이에 더해 혁신을 보여줬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 아테네, 아버지가 이룬 중무장 보병 중심이었던 당시의 작전 개념을 깨뜨리고, 그는 적극적으로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했다.
“전쟁터에서는 주도권을 쥔 쪽이 이긴다.”고 말했을 정도로, 군사는 즉시 결단, 즉시 실행하는 순발력, 기동력을 중요시했고 이를 몸소 보여줬다.
그 기병의 활용의 정점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마름모꼴의 기병 진형에서 그는 항상 선두에 위치해서 진격했다.
“Punta di Diamante. 다이아몬드가 달린 끝.”
무엇보다도 그가 연전연승하고 모든 전투마다 희생자가 극히 적었던 건 본인 스스로 최일선에서 적과 전투를 했고, 이로 인해 전쟁을 정말 빠른 시간에 마무리했다. 전쟁 중 최고사령관이 죽으면 정상적인 전투가 불가능했던 고대에 보통 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래서 그는 더욱 위대했다.
총사령관의 부상, 생사의 고비마다 그의 죽음을 걱정한 참모와 병사들은 이를 만류하지만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해준 것도 내가 이제까지 보여준 용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보았을 때, 실제로 그만큼 아래의 말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도 없다.
“지휘관이 되려면 무술에 뛰어나야 했다.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부하에게 하라고 명령할 수 없다. 고대의 뛰어난 장군은 일반 병사보다 무술에 뛰어난 남자였다. 병사들은 애초에 자기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면 따르지 않는다.”
사치에도 관심이 없었던 그는 모든 전리품을 부하들과 나눴고, 그들과 똑같은 식사, 같이 묵었다. 이런 차이가 그를 아래와 같은 칭송을 하게 한 ‘소박한 위대함’이 아닐까. 그리고 그의 이름은 고대 여러 도시 중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아래와 같은 글로 다시 곱씹어본다.
“후에 사람들이 그에게만 '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붙였는지. 그가 그리스도교의 성인도 아닌데 오늘날의 신자 부모가 아이에게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을 끊임없이 붙이는지를. 그이유가 단지 넓은 지역을 정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달리 사랑하는 자식에게 그 이름을 붙여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알렉산드로스가 도달한 인더스 강부터 카이사르 밟은 브리타니아까지가 고대인이 알고 있던 세계였다. 그 상태는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들어가도 바뀌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든 이후에나 변했다. 마르코 폴로, 크리스토퍼 콜롬보라는 두 이탈리아인에 의해. 1500년 이상의 세월동안 서양인은 동쪽은 알렉산드로스가 동쪽은 카이사르가 밟은 지점까지 세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항상 모든 전쟁, 전투뿐만 아니라 정책에서도 신속함을 보여줬던 그였기에,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는 멀리 인도까지 갈 수 있었고, 위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단지 협의에 있어서 기병의 활용을 통한 혁신뿐만 아니라, 현대까지 적용되는 모든 전쟁, 그리고 정치의 혁신을 보여준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다른 한편, 이렇게 ‘무언가’를 이뤄낸 그리스가 쇠퇴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그와 같은 빠른 변화, 지속성의 부재가 아니었을까도 고민해본다.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로마인은 정책을 제안한 사람의 운명에 좌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법률로 제도화했다. 올바른 정책은 지속되어야 한다.”
“로마를 강력하게 만든 요인은 패배자의 동화에 성공한 로마인의 생각이다.” - 플루타르코스
한 때, 유럽의 중심이었던 그리스에 대해 마지막으로 아래와 같은 글로 마무리한다.
“민주정치도 만들었지만 우중정치도 만들어냈다. 시민전원의 투표도 이뤄냈고 부정투표도 실현했다. 올림픽도 만들었고 보이콧도 했다. 뭔가를 만들어내면서도 그 이면까지 만들어낸 셈이다. 유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건너편을 아시아라고 이름 붙인 것을 비롯해, 좋든 나쁘든 우리는 많은 것을 고대 그리스인에게 빚지고 있다. 철학과 과학, 예술만이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인의 역사도 감탄과 어이없음의 되풀이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최초의 도서관. 무세이온에 관한 작가의 생각이다.
“읽으면 생각하게 된다. 생각을 가지면 동료 연구자들과 이야기하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면 논문으로 발표하고 싶어진다. 고대과학의 최고전성기는 기원전 3세기부터 100년간. 이는 헬레니즘 시대와 완전히 중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