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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다니엘 Aug 15. 2022

2차세계대전, 독일군 원수의 눈으로.

만슈타인 회고록


지금 현대 국제질서를 있게  제일 결정적인 사건. 2 세계대전. 처칠의 회고록을 보며 영국의 관점으로 전쟁을 바라보았다면, 이번에는  전쟁을 시작한 독일군의 입장으로 이를 바라보고자 했다. 주인공은 독일 장군 만슈타인.


우리에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만슈타인.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롬멜과 비교해 그 명성이 덜 알려진 것은 어쩌면 영미권 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을 상대했던 롬멜에 대한 칭송을 접한 반면, 만슈타인은 러시아 전역에서 이름을 날렸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히틀러의 만슈타인에 대한 평가,

‘만슈타인은 아마도 참모제도가 낳은 가장 유능한 인물일 것이다.’


전쟁 중 그의 삶을 통해 올바른 군인, 지휘관, 리더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I. 만슈타인은 누구인가.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간략하게 알아보자.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결과인 베르사유 조약을 위배하고 비무장지대(라인란트)에 병력을 배치하고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는데, 프랑스와 영국은 수수방관하고 평화협정에만 목맨다. 이는 다시 끔찍한 전쟁이 안 일어났으면 하는 두 강국의 유약하면서도 실책의 연속이다. 이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서야 영국은 선전포고한다. 이후, 독일은 두달이 채 되지 않아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과의 일전을 준비한다.


이 때 프랑스 전역의 마스터플랜을 고안한 이가 주인공이다.


“육군총사령부의 계획(히틀러의 계획)이 1914년 슐리펜 계획(벨기에의 평원이 공세의 중심)을 답습했고, 환경이 바뀐 현재 이를 답습하는 것은 확실한 패착을 불러일으킴이 분명했다. 따라서, 만슈타인은 공세의 중심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기복이 심하고 삼림이 많은 아르덴 지방 돌파로 변경, 슐리펜 계획을 발전시키고 애초의 그 목적이었던 프랑스군 전체의 완벽한 패배를 현실화했다.”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로이센의 몰트케는 ‘적의 주력과 처음부터 조우함을 가정하지 않는 작전은 있을 수 없다. 작전 계획을 구상한 자로서 그 계획의 구조적, 세부적인 사항이 애초에 계획했던 각본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 믿는 자는 능력이 없는 전략가뿐이다.’고 말했다. 애초에 프랑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염두하지 못한 히틀러의 계획은 1차 세계대전과 같이 소모전을 불러일으킬, 최종적인 결론을 내놓을 수 없는 부족한 전략. 배후의 러시아를 고려하면 더욱 위험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애초에 결정적인 승리를 중시했던 그의 작전을 받아들여 프랑스 전역을 한 달 반 만에 종료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영국 혹은 소련까지 전쟁에서 배제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히틀러의 신뢰를 받고 있던 공군참모총장 괴링의 의견과 달리 공중폭격만으로 영국의 항복을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 그는 판단했다. 어떻게든 상륙작전에 성공해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그는 다른 한편, 해군 작전에 대한 이해는 영국인만 하지는 못했다는 생각도 일견 든다.


이 때 처칠의 말을 인용해본다.


“영국에서는 우리의 결점이 어떤 것이든 바다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이해하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우리 핏속에 흐르고 있는 기질이었으며, 그러한 전통은 전체 국민을 약동시켰다. 영국의 힘은 물론 섬나라의 저항력과 해군 군사력의 오랫동안 인내할 수 있는 저력을 이해하는 데에서 나왔다.”


만슈타인은 전쟁을 거시적으로 보는 전략가로서 최고의 두뇌이긴 했지만, 여전히 육군이었기에 상륙작전을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점, 지상 작전에서의 승리만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처칠만큼 이해하지는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강력했던, 혹은 제일 강력해질 수 있는 세 나라, 영국과 소련, 미국까지를 적국으로 만든 건 당시 독일은 필연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했는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으니 불필요한 논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독일이 만슈타인의 계획처럼 프랑스 전역처럼 공세로, 코카서스, 스탈린그라드, 레닌그라드에 전력을 투사하지 않고 모스크바에 집중하였다면 동부전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나폴레옹의 선례를 보면, 모스크바를 점령했음에도 이미 황폐해진 모스크바에서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목표를 잃은 채로 전쟁에서 패배했다. 독일군도 그런 길을 걷게 되었을까. 애초에 그렇게도 큰 나라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을까. 혹은 그들도 프랑스처럼 항복하게 되었을까.


어찌되었든 그 당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의 승리 이후, 바다사자 작전(영국 상륙작전)의 실패 이후, 독소불가침 협약을 폐기하고 소련을 침공한다. 즉, 영국을 전쟁에서 배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다가 소련 침공을 결정한다.


이후, 동부전선 크리미아(크림반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만슈타인.

“7월 1일 러시아의 가장 강력했던 요새가 함락되던 날 만슈타인은 영도자로부터 전문을 받았다. ‘크리미아에서의 승리를 얻는 동안 케르치 반도의 섬멸 전투와 지형적, 인위적으로 강력하게 방어된 세바스토폴을 함락한 당신의 뛰어난 공적을 기려 원수에 임명합니다. 이 진급과 당신 휘하에서 영웅적인 업적을 이루어 낸 크리미아에 참전한 모든 전투원에게 특별한 휘장을 수여함으로써 독일 국민 앞에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원수 지휘봉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만슈타인의 군 경력 중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롬멜이 토브룩을 함락시켜 6월 21일 원수가 된 것처럼 만슈타인도 원수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원수가 된 그는 집단군 사령관으로서 몇몇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에 이은 전쟁의 향방을 뒤집진 못했다.


II. 문제적 인물, 히틀러.


회고록을 통해 히틀러라는 인물에 대해 깊게 알게 되었다. 그의 평가를 살펴본다.


먼저,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던 일화다. 히틀러가 보채는 데도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전쟁을 꺼리던 독일 육군 장성들. 히틀러는 이들을 행동하지 않는다고 혐오하는데, 만슈타인은 이 평가를 보기 좋게 뒤집는다.


만슈타인의 계획(일명 낫질작전)을 들은 히틀러.

‘그는 확실히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며 작전적 재능을 보유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다음은 히틀러에 대한 만슈타인의 평가다.

“그는 확실히 작전의 초기 단계에 대해서는 특별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놀랄만한 수준의 비상한 기억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 모든 기술적인 사항들과 군사력에 대한 문제들을 재빨리 인지할 수 있었다. 그의 직관과 범상치 않은 열정이 우리의 재무장 단계에서는 수많은 성취를 이루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중략) 하지만 그의 우월성에 대한 자만은 결국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가 부족했던 것은 경험에 기반한 군사적 능력이었으며, 그의 직관력이 이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됭케르크에서 영국군의 철수를 용인한 히틀러. 훗날 러시아 전역에서 드러나듯이 히틀러는 확실히 작전 분야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전 도중 조언할 수 있는 군사 지휘관을 육성하지 못했고, 이는 히틀러가 군 지휘관을 지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 침공 계획에 대해 아래와 같은 생각을 덧붙인다.

“1939년 가을 히틀러가 프랑스의 방어력을 무시하고 있었음에도 잘 짜인 독일군의 공세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가능성을 본래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성공이 실제로 그에게 놓이자 그는 제반 조건이 다른 전장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통찰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애초에 소련과의 전쟁이 필연적으로 질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히틀러에 대한 악담은 소련과의 전쟁 이후 한층 더한다.

“히틀러는 국가수반이면서 국방군의 최고사령관이자 육군총사령관이었으며, 마지막 직책의 경우 직접 작전을 지휘하면서 적극적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모든 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것을 잃고 있었다.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사령관의 역할보다 육군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에 일체감을 더 많이 느끼면서 거의 모든 정신을 동부전선에만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히틀러는 국방군 지휘참모부를 육군참모본부에 상응하는 또 하나의 작전지휘 기구로 간주하는 경향이 더 심해졌다.”


“그는 휘하에 묵묵히 순종하며 그의 의지를 실현해 줄 사람을 둔 새로운 나폴레옹이 되고자 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나폴레옹처럼 군사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천재적인 군사 감각마저 가지지 않았다.”


다음은 독일군의 전투교리를 살펴보자.

첫째, 작전은 언제나 융통성과 더불어 유연하게 수행

둘째, 모든 계급의 지휘관들에게 가능한 명령권과 재량권을 부여할 것.


물론, 이 2개의 교리는 히틀러가 갖고 있는 생각과는 매우 상반된 개념이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군 내부에서 국가사회주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황이 점점 어려워질수록 승리를 답보하는 수단으로써 그 신념의 중요성에 점점 더 의존했다.”


“독재자는 그의 명예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칠 위험에 대해서는 감수하기를 싫어했으며 그의 다른 능력들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전투와 본질적인 군사 능력은 부족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제껏 확실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온 군 지휘관들은 전쟁이 – 본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결정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단호한 수행이 필요한 – 전쟁술의 영역이라고 믿었다. 이 전쟁술은 기동작전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었는데, 독일군의 우월성은 기동작전에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아마도 1943년에 러시아군의 공세 전력을 약화시켜 결국 동부전선에서 정치적 방법을 통해 교착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만슈타인이 결정적으로 중앙권력에서 멀어지게 된 계기이다.

‘만슈타인 원수, 나는 내가 장성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소. 당신조차도 당신의 부하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을 것이오.’


그러면서도 그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대해 만슈타인은

“프로이센 원수는 배반하지 않는다. 이것은 군부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다.”며 거절했다.


그는 히틀러의 자살 소식도 처음에 믿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세 인물. 처칠과 스탈린. 그리고 히틀러.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나뉘고, 역사의 평가는 극명하게 다르지만, 실제로 그들의 성향은 놀랄만큼 비슷한 점이 있다. 특히 스탈린과 히틀러는. 무조건 전선을 사수하라고 한 건 스탈린이 먼저다. 히틀러는 그 어떤 것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스탈린도 유대인 학살과 같은 짓은 안 했지만 말도 못하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제까지 러시아군과 싸웠던 우리는 러시아군이 요새 외곽과 도시 내부에서 최후까지 일전을 불사하리라 생각했다. 무선을 통해 되풀이되는 스탈린의 명령은 최후의 한 명까지, 한 뼘의 땅도 적에게 주지 말고 저항하라는 것이었다.”



III. 군인으로서의 그의 신념


“지휘관은 베일에 가려진 적의 다음 행동을 간파해야만 하고 적어도 적과 우리에게 발생할 사항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는 정확하게 예측하여야 한다. 관할하는 지휘 범위가 확대될수록 유능한 사령관은 미래에 대해 더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지키고자 하는 자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

“Whoever tries to hold on to everything at once, finishes up by holding nothing at all.”


만슈타인이 히틀러에 대해 제일 많이 인용하는 부분. 히틀러는 실제로 열세에도 불구하고 확보한 전선을 계속 지키라는 명령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참패. 끝끝내 결국 전쟁을 패배로 이끄는 데 제일 큰 역할을 한다.


“늘상 인기 있는 쪽으로, 그리고 자기와 맞지 않는 정권이 성립된다면 이쪽저쪽을 기웃거릴 수 있는 정치가와 달리 군 지휘관은 그렇게 가벼운 자리가 아니며, 군인은 명령에 따라 장소와 시기를 막론하고 싸워야 한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 또한 실수하기 마련이므로, 나는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11군이 악조건 속에서도 크리미아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던 것과 작년의 마지막 시기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남부집단군이 주도권을 다시 얻었던 점을 말하고 싶다. 우리가 보여준 것보다 뛰어난 지휘력을 지닌 사령관과 참모진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지휘권이 있는 이상 나의 신념에 따라 지휘하고자 한다.”


책임지는 지휘관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본다.


“계획에 따라 수행되는 작전은 없다.”

“작전의 요체는 매우 명료하고 간단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매우 간단한 것조차 실행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고, 진정한 어려움은 결정을 하는 문제가 아니라 확고부동하게 그것을 완수하는 것에 있다.”


시뮬레이션 훈련만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실전은 정말 다르고도 다르다.

만슈타인에게 프랑스와 동부 중 어느 전선이 독일의 전략적 전선인가에 대한 대답.

‘그 문제는 정치적 결정이며, 군인은 정치가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군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논의해야만 하며 이를 넘어 정치적 문제까지 뛰어넘으려 하면 안 될 것이다.’


“고위 사령관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몇 년간을 병사들에게 승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고도, 그리고 그들의 손으로 패배를 앞당기라고도 할 수 없었다.”

“No senior commander can for years on end his soldier to lay down their lives for victory and then precipitate defeat by his own hand.”



IV. 그가 지켜본 전쟁


“세월이 흐른 후 우리가 전쟁에 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에서야 독일의 패배가 빠를수록 독일이 겪었던 끝없는 재앙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그 당시 독일이 패하리라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사적으로 교착화를 이루어내면 정치적으로도 교착화를 만들 수 있었으며 이는 동부전선 남익의 전황이 안정되는 경우에만 가능했다... (중략) 그러려면 6군(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독일군)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힘까지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붙잡아 두는데 투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용맹했던 부대들을 스탈린그라드에서 녹아내리게끔 만든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전쟁의 비극적인 본질이었다.”


“실제로는 이러한 단순한 사건들 자체로써 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결정된 것은 아니다. 2차세계대전의 성패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이며, 가장 중요한 원인은 히틀러의 정치적, 전략적 결정에 따라 독일이 지속적으로 연합군에 대해 절망적인 열세에 놓여졌다는 점이다.”


그런 그조차도 전쟁범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고 포로들에 대한 학살은 물론,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눈감았다. 이후, 재판에서도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였으며 자신은 군인의 임무만 충실하게 했음을 강조했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다시 떠올려보게 되는 계기이다.


독일어에서 영어에서 우리말로 이중번역된 책을 읽었다. 나의 독일어 능력이 갖춰진다면 언젠가는 읽어볼 수 있을까 하고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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