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독일은 EU를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늘날의 독일(도이칠란트)·오스트리아 모두 ‘독일어(도이치)’를 쓰기에, 마치 옛날부터 원래 ‘독일’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오스트리아가 그 독일어를 함께 쓴다는 인상을 준다. 현재의 독일이 크고 오스트리아가 작은 나라이니 그런 인상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글쎄.. 지금으로부터 200년전은 어떨까.
“중세 이후로 도이치 사람들이 사는 곳인 도이칠란트 전체의 황제 직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쥐고 있었고, 베를린이 아닌 빈이 도이치 사람들과 제국의 중심지 노릇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은 어떻게 생겼고, 어찌 두 번의 세계대전의 중심에 서있었으며, 어떻게 다시 유럽의 리더가 되었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Part I. 독일 제국(비스마르크~히틀러)
-저자: 제바스티안 하프너 /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 통일의 주역인 프로이센은 1701년 처음 등장하여 1815년 빈 회의 이후 비로소 ‘도이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보불전쟁, 대프랑스 전쟁은 최초의 도이치 민족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최초의 ‘도이치 제국(das Deutsch Reich)’이 탄생했다.
“하나의 도이치 민족국가는 19세기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오래 묵은 신성로마제국이 민족국가였던 적은 없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의 뿌리는 나폴레옹의 프랑스였다. 나폴레옹의 유럽전쟁에 동원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는 증오의 대상이자 경탄의 대상이었다.
“프로이센의 도이치 정책과 도이치 민족주의 진영 사이에 맺어진 일그러진 연합에서 도이치 제국이 생겨났다.”
여기서 독일이 왜 양 세계대전의 중심에 있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저자는 서술한다.
“제국이 거의 처음부터 스스로의 파괴를 추구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바로 이 역사에서 무시무시한 요소다. 점점 커지면서 점점 더 예측할 수 없게 되는 제국의 권력행사와 더불어, 제국은 스스로 적들을 창조했다. 제국이 적들에 부딪쳐 부서졌고, 적들 사이에서 둘로 나뉘었다.”
철혈 정치, 호전적으로 알려진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알려진 것과 달리 국가의 안정을 위해 외교적 수단을 항상 고려했고, 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즉, 그는 독일의 확장을 최초부터 바라지 않았다. 즉 열강들의 해외 식민지 정책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을 단념했고, ’유럽이라는 오뚝이의 무게추‘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최고의 선의와 가장 위대한 정치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국이 위험에 연루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비스마르크의 최고 승리가 자신의 실패의 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도이치 제국의 건설은 이미 붕괴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 사후, 빌헬름 황제는 ‘대양함대 건설’, 아프리카,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확장정책의 결과로 많은 열강과 갈등이 생겼다(보불전쟁의 결과로 철천지원수가 된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여전히 유럽의 강대국일 뿐 세계의 강대국이 아니었던 도이칠란트는 비로소 ‘세계강대국’이 되고자 했다.
빌헬름 시대 제국총리 뷜로는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늘로 밀어 넣으려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도 양지로 들어가려는 것 뿐이다.”
결과론적으로 20C초,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가까워졌고 독일은 잇단 외교적 실책으로 유럽에서 제일 강한 세 나라를 적국으로 만들었다.(비스마르크는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지렛대를 유지, 선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비스마르크와 몰트케가 비관적 조심성’이 있었다면, ‘빌헬름 황제는 낙관적으로 힘을 과대평가하여 오만한 계획’을 세웠고,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1차 세계대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쟁 기간 내내 총체적 승리는 어느 편에도 없었지만,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독일에게 소모전은 분명히 불리했다.
한편, 전쟁 발발 이후 4년이 지나고, 도이치 제국의 ‘기적의 무기’가 된 레닌 덕분에 독일은 동부전선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부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918년 서부전선의 공격 계획은 뒷날 1940년 만슈타인 작전을 연상시키는데, 만슈타인 작전은 성공했다. 이 작전은 영국-프랑스 전선의 이음매 부분에 총력을 집중했고, 영국전선이 끝에서 뚫리면서 붕괴지점 이북에 고립된 영국군은 바다까지 밀렸다. 공격군은 온전히 프랑스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총공세는 연합군 진영에 위기를 불러왔지만, 이런 위기는 극복되었다(2차 세계대전과 달리). 독일군이 일시적인 공격에는 성공하더라도 방어선을 완전히 돌파할 수는 없었다. 공격이 진격시키는 것보다 구멍이 생기면 방어하는 일이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병전쟁’, 1차 세계대전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그 어떤 군대도 개별 군인의 행군 속도보다 더 빨리 진격할 수 없었다.”
결국 완전한 패배는 없었지만 독일은 패전국의 멍에를 쓴다.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케인스가 서술하듯, 패전국에게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 베르사유 조약은 새로운 전쟁을 필연적으로 암시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빈 회의에 패전국 프랑스를 받아들이는 조항을 포함시키는 것과 달리 독일을 유럽 질서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베르사유 질서는 정당성도 균형도 얻지 못했다.”
이후, 한 차례의 극심한 경제위기 끝에 미국의 경제원조로 점차 회복하던 독일 경제는 1929년 대공황에 의해 다시 붕괴된다. 그리고 끝내, 독일은 1919년 이후로 강대국으로의 부활에 걸림돌이 된 엄청난 전쟁배상금 지불의 의무와 매우 작은 방어력만 유지할 의무를 털어버렸다. 이 같은 성공을 나치당, 히틀러가 획책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하다는 바이마르 헌법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악한 지도자가 탄생했다.
“배상금을 벗어버리려고 의도적인 경제 불황을 장기화시킨 노력 끝에 전쟁배상금의 의무는 벗어버렸지만, 이 성공은 가난해진 도이치 사람들이 떼를 지어 히틀러에게로 몰려가게 만들었다.
이전 시대를 구분하는 선전과 반대세력에 대한 테러, 완전 고용의 부활, 군비 확장, 영국과 프랑스의 굴종적인 대독일 외교, 라인라트 진군,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의 강제 합병 등. 이 모든 것이 히틀러를 천재적인 지도자,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십수년간 비참했던 독일인들에게는 그러했다.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감정, 민주주의에서 구원되고 해방되었다는 감정, 사람들은 확고한 손길과 확고한 의지를 지닌 한 남자가 정상에 있기를, 질서가 잡히기를 원했다.”
히틀러는 독일 제국의 절대적인 총통이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제국은 비스마르크와 달리 끝없이 팽창하고자 했다.
“히틀러에게 도이치 제국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확고한 국가질서, 헌법을 만들지도 않았고, 기관과 조직들은 서로 협조한 적도, 서열관계를 맺은 적도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계속 움직이게 하려고 그렇게 안했다. 히틀러에게 제3제국은 엄청난 영토 확장을 위한, 새로 만들어낼 권력체를 위한 발판이자 출발점이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서 시작한 전쟁. 독일은 1940년 6월, 6주만에 프랑스를 점령했다. 영국과의 공중전이 서부전선에서 히틀러의 승리를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히틀러가 1941년 러시아, 이어서 미국마저 적대국으로 만들기로 한 결정에서 독일은 이 전쟁에서 무조건 패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과에 이른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1949년 동독과 서독이 분리된 것은 냉전, 세력균형의 산물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독일은 어떻게 다시 재건하고, 베스트팔렌 원칙을 이겨내고 통일할 수 있었는가.
Part II. 유럽의 병자에서 EU의 리더로.
- 저자: 폴 레버 /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
현대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세워졌다. 1945년은 ‘영시점(Stunde Null)이었다. 너무 약해진 독일이 소련의 영향력 아래 들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이 엄청난 경제적 지원(마셜 플랜)을 하기도 했지만,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투지와 결단력으로 재건을 이뤄냈다.
일례로 당시 독일은 남성이 극히 부족했다. 5백만명 이상이 전쟁에 목숨을 잃었고, 3백만명은 전쟁포로로 소련에 억류되어 있었다. 수백만의 여성은 6개월 이상 소련군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 여성들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전쟁의 잔해를 치우고 노동력을 공급했다. 본래 집에서 내쫓긴 동부유럽의 1천 2백만명의 독일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중 50만~200만명은 죽거나 살해당했고, 독일로 온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이런 고난을 넘어 1950~60년대 서독에서 경제 기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경험 덕분에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주장, 독일이 자국 자원을 공유해야 EU가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다.
“우리처럼 하라. 경쟁력을 키우고, 자립하라. 다른 나라가 구해주기를 기대하지 말라.”
“당연하게도 독일인들은 더욱 편한 자격으로 몇몇 경우 혜택을 보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똑같이 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독일은 1990년, 통일 이후 다시 위기를 맞는다. 97년 동독은 90년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산업생산능력의 70%를 잃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다시 희생을 감내했다.
“독일의 힘은 군사력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경제다.
독일의 경제규모, GDP는 프랑스나 영국보다 25%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다른 나라의 경제를 모두 왜소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 독일 경제의 힘은 규모가 아닌 성격에 있다.
제조업 기반의 수출중심형 경제, 합리적인 가격/품질/신뢰성으로 모두가 사고 싶어하는 ‘독일제’, 건전한 국가재정, 높은 수준의 사회연대, 교육과 전문적 기술에 대한 헌신, 제조업체와 중소기업의 성공적 조합, 노-사 공동결정의 관행 등 많은 국가, 기업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한편, 독일 의회 정치의 안정 또한 독일의 기적에 한몫했다.
“독일은 정치적 수사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보다 전문지식, 실질적 전문성을 높이 사는 시스템 덕분에 전문지식의 개발이 권장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분단된 독일은 냉전의 영향으로 상호간에 적대정책으로 일관한다. 이와 같은 기조는 69년 최초로 보수성향의 기민당에서 진보성향의 사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져 변화를 맞는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은 ‘접근을 통해 동독을 변화시킨다.’는 모토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82년 사민당에서 기민당으로 정권 교체가 되었음에도 헬무트 콜 총리가 전임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여 끝내 통일을 이뤄냈다.
통일 이후, 슈뢰더 총리는 新중도(Neue Mitte)로 대표되는 사회적 시장경제, 노동시장 개혁, 독일의 사회적 모델 현대화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단순히 인기영합주의를 뛰어넘어 장기적인 국익, 가치를 지향한 정치의 진면목이다.
그리고 이를 훌륭한 법치주의. Land로 대표되는 지방자치제도가 뒷받침한다.
대처는 독일의 통일을 끝까지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독일 국민의 민주적 본능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안정적인 독일의 정치는 그녀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보여준다. 과연 애국심 표출을 극대로 자제하고, 나치에 대한 반성을 뼈저리게 하는 독일이 다시 길을 잃을까.
Afd(독일을 위한 대안)의 등장으로 위기감이 고조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후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가치를 지향하여 성공한 독일이 극단주의로 빠질 리는 만무하다.
현대 독일은 ‘영시점’에서 세워진 ‘과거가 없는 나라’다.
과거 프로이센의 영광이 현대 독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전혀 없다. 국가적 규모의 공동행사도 없고, 통일기념일 행사도 주로 지역적인 성격을 띠며, 많은 나라에 흔히 있는 열병식, 제헌절, 현충일과 같은 국가 행사가 전혀 없다.
이런 독일에게 EU는 그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마치 국가대항 축구경기처럼.
“축구가 독일에서 중요한 이유는 독일인들을 한데 모으고 자신들의 국적을 축하하게 만드는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독일 스스로는 하지 못하는 감탄, 찬사,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설립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가장 많은 예산을 담당하는 독일에게 EU는 과거로부터 벗어나 본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구이다.
이는, 새로운 유럽 공동체의 건설이 과거와 관련이 없고, 1945년 이후 독일의 재건과 같은 방식으로 ‘영시점’에서부터 진행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한편,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역사적 앙금을 배제한 덕분에 많은 동맹국들이 자국의 과거에 대한 가지는 애착에 둔감하다.’
이를 주안에 두고, 브렉시트로 대표되는 EU의 문제에 대해 알아보자.
‘영국의 민주주의 제도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고, 정치지도자는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았고, 자기 신뢰는 산산이 부서진 적이 없었다. 자신들이 견뎌온 방식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승리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영국은 단 한번도 국토를 침략당하지 않았고, 자랑스러운 의회 정치를 지속했다. 런던은 뉴욕에 이은 세계 최대의 금융시장이며, 그에 따른 파운드의 영향력도 막대하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같은 외교, 군사적인 영향력이 크다. 이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민족국가의 주권’이다.
이런 영국에게 EU는 생경, 기이한 것이며 반면 EU/유로화의 구조와 규칙을 본인들의 이미지대로 구축한 독일에게는 자국 정치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다. 이런 독일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독일의 EU주도가 독일 자국의 이익만을 보호, 그 이상의 비전이 없고, 단지 철저한 예산편성만 있을 뿐이다”
“독일은 어느 영역에서도 EU의 전반적인 기존법규를 되돌리는 데 관심이 없다. 현재 시행 중인 모든 입법이 독일에 적합하다.”
“유럽통합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대한 난처한 문제가 논의된 적이 없다. 정치인들은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설명하지 않은 채, 그 여정의 방향을 옹호하면서 다음 단계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독일 평론가에게 이런 침묵은 미덕이다.”
09년도 금융위기로 시작된 EU와 유로존 내에서의 갈등은 남부유럽 국가에 대한 ‘징벌적’인 경제 시스템 개선 요구와 최근에는 이민 문제로 폭발했다. 이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 브렉시트다.
“늘 정치적 정당성보다 결과를 중시했기에 핵심적 논리근거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효율성, 경제에 있었다...(중략) EU의 복잡한 의사결정 체계와 실효성 있는 실행능력의 결여에 있었다.”
“EU의 주요 문제가 부족한 금융감독의 문제가 아니라 결속, 창의성, 신뢰의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돈만으로는 유럽을 이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간, 유럽 내 프랑스와 독일의 동등한 관계는 유럽 연합의 균형적인 정책 설정에 도움이 됐지만 최근 몇 년간 프랑스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해지고 영국이라는 또다른 균형추가 사라짐으로써 EU는 독일의 의사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즉, EU 전체의 균형 있는 의견을 대변하는 힘이 상실했다는 지적이 많다. 저자의 EU 미래에 대한 예측이다.
“가난한 나라는 갈 곳을 잃고, 프랑스는 외교정책에서만 동등한 입장일 것이며, 영국은 유럽군 창설, EU 안보리 상임이사국 등 ‘전능한 유럽 초국가’의 출현에 대한 발언권을 상실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EU 구조에서 ‘보다 새로운 지방 분권적 대안’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의견은 유례없는 질병으로 또다른 국면을 맞았다.
코로나19로 인해 국가주의적인 정책으로 더욱 회귀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 각종 혐오, 차별 등의 문제가 떠오르고 있는 세계에 EU와 유로존은 ‘경제적’이지 못하고 실패한 실험으로 끝날 것인가.
인류가 단한번도 가지 않은 길,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 소수에 대한 보호’ 등으로 대표되는 EU가 지향하는 가치는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계속 지속될 수 있는가. 역사는 우여곡절 끝에 점진적인 발전을 하고 있고,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 되려나.
인류가 어려움 속에서도 자국이기주의, 혐오가 아닌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길 희망해본다. 그 속에서, 독일은 그동안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