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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Aug 29. 2022

이탈리아 기행.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알파와 오메가, 가톨릭의 방향성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많은 성인이 그랬듯, 어린 시절 망나니였다. 먼저 역사를 돌아보자. 12세기, 당시 아시시는 신구 세력 간의 밥그릇 싸움이 치열했다. 구세대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각종 권한을 인정받아 기반이 단단했는데, 신세대가 이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켜 이 구세대를 몰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근처 페루자까지 진격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이 新귀족들을 후원했고, 이 전쟁에 어린 프란치스코도 기사가 되길 꿈꾸며 참가하게 된다. 전쟁의 결과는 모든 물자와 재정 등이 월등했던 舊귀족의 승리. 덩달아 프란치스코도 포로로 잡혔다. 그의 아버지는 막대한 보석금을 지급하여 그를 빼낸다.


이후, 또다른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는 그 유명한 십자군 전쟁. 절치부심, 명예 회복을 노렸던 프란치스코는 야심차게 출정했지만, 신의 계시를 듣고 회심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금의환향은커녕, 또다시 실패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셈. 이런 그의 모습을 프란치스코 성당 앞의 동상이 보여주고 있다. 풀이 죽어 얼굴조차 잘 못 들고 말을 타고 돌아오는 모습이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야, 무너져가는 나의 교회를 다시 지어라.”라는 음성을 듣고, 이것이 무너져가는 성 다미아노 성당이라고 생각하고는, 아버지의 비단을 빼돌리고, 가산을 탈탈 털어 이 성당을 수리했다. 이걸 알게 된 아버지는 분기탱천하여 그를 집안 창고에 가두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가 그를 풀어주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는 계속해 아버지의 가산을 빼돌려 무너져가는 교회에 모두 쏟았다. 이에 아버지는 결국, 주교에게 교회에 손해배상청구를 하게 되는데, 프란치스코는 이 재판에서 아버지가 준 돈과 옷을 모두 벗어던지며, 아버지 도움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작은 형제들을 조직한다.

한편, 당시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한 젊은 수도자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당시 주교좌 성당)을 어깨로 떠받치는 꿈을 꾸게 된다. 교황은 그 수도자가 프란치스코라고 생각하여 프란치스코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허름한 성당에 본부를 두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지금 이곳은 아시시 성 마리아 천사의 성당 안에 보존되어 있다.

또, 혼인을 앞둔 백작의 딸 글라라가 찾아와 프란치스코에 입회할 뜻을 밝히고 수도복을 입는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와 함께 끝까지 수도생활에 전념한다. 이것이 지금의 글라라수도회의 시작이다.


한번은 프란치스코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무슬림에게 붙잡힌다. 당시도 십자군 전쟁이 한창 있던 와중. 그는 술탄 앞에서 불 위를 걷게 되는데, 이 모습에 감격한 술탄은 그때부터 다른 성직자는 안 되고 오직 프란치스코회만 예루살렘을 머무를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된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도 있다. 처음부터 뜻을 같이했던 그의 동료들도 그를 저버리고 낙담하기도 한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으로서, 예수의 삶과 제일 비슷한 성인이라고 그를 누구보다도 존경한다. 지금의 교황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쓴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아시시에는 그의 삶의 시작이 된 성 다미아노 성당과 사후에 지어져 그 무덤이 있는 프란치스코 성당, 그의 죽음까지 함께 했던 글라라를 기리는 성당, 마지막으로 그가 최초로 프란치스코회를 조직하여 시작한 작은 경당까지, 마리아 천사의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말 그대로 프란치스코의 알파와 오메가가 모두 있는 셈이다. 물론 이처럼 프란치스코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도시이긴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참 아름다운 도시다. 산 중턱에 있는 움브리아의 소도시. 가보진 않았지만, 움브리아의 다른 곳도 이런 느낌이라고. 그나저나 이곳에 이탈리아인들 중에 도를 닦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성인이 나오고 기가 강한 곳이라서 그럴까. 우리로 따지면 어디가 될까. 안동 같은 곳일까. 잘은 모르겠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성당만 잠시 언급해본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대성당을 조토와 그의 제자가 그려놓았다. 어마어마한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새들마저도 성인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제일 유명하다.

한편,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기 전에 ‘태양의 찬가’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가 이태리 최초의 문학작품이다. 태양의 찬가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형제자매라 부르며 이를 찬양하는 노래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생태, 환경 분야를 가톨릭에서 언급할 때 그 뿌리가 될 수 있는 이유일테다. 현대 사람들이 말하는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몸소 실천했기에.

산업, 학문에서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경제적인 이익도 따른다는 논리를 펼치곤 하는데, 신부님은 종교가 사람들의 인식 개선, 철학적 기반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보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랄까.


사실은 우리는 종교가 항상 보수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종교도 수천년간 변화하고 발전해왔고, 그런 개혁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가톨릭이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이 기후변화가 위기의 가톨릭에 있어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새로운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일환으로, 교황님도 수년 전부터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실천했기에, 가톨릭 공동체가 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면서.


또 다른 신부님은 사람들은 가톨릭이 하느님, 예수님을 믿는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가톨릭의 제일 큰 모토는 평등의 개념이라고. 모두가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 그런 이유로, 조선 후기 가톨릭은 신분제를 부정하는 체제 전복적인 사상을 하고 있었기에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 또 혹자는 창세기에 인류가 세상을 정복하라는 점을 꼽으며, 기후변화를 종교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는데, 이는 번역의 오류가 있다는 점을 꼽는다. 잘 가꾸고 경작하라는 거였지, 파괴하고 정복하라는 게 아니었다는 점. 어쩌면 평등은 인류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신부님은 이런 말을 수차례 하셨다.


“종교도 이제는 단순히 믿으라고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내가 단순히 맹목적으로 믿기보다는 어떤 방향으로 이 종교를 받아들일지, 또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가 이 모든 것의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에 더 뿌듯하고 동기부여가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무너진 교회를 다시 일으키라는 계시. 당시 성인은 최초에 이것이 조그만 성당을 다시 살리라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이는 사실은 무너져가는 가톨릭을 개혁하고 살리라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의 교회도 그런 위기에 있지 않은가. 이렇게 그냥 시간이 지나면 종교는 본래의 역할을 다해내지 못할 것이다. 지금 유럽에서처럼, 한국도, 다른 나라들도.


여담으로, 프란치스코회는 본부가 있고, 그 밑에 지사가 있는데, 최초에 이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이처럼 조직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현대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최초의 현대 경영이 적용된 조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랬기에 그 어떤 수도회보다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이 모든 걸 성인은 800년 전에 다 알고 계셨을까. 아마도 몰랐을 것이고 본인도 놀라겠지.


뜻깊은 여행, 순례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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