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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Aug 24. 2022

이탈리아 기행

수도원 기행


4월에 이어 다시 이태리에 오게 됐다. 다섯 달도 채 되지 않았다. 1년 가까이 이태리 친구 옆에서 이태리어를 듣다 보니 대충 눈치로 무슨 말 하는지도 들리는 것만 같다.


첫 번째 목적지는 베로나. 그 유명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곳이다. 재밌는 건 정작 셰익스피어는 베로나를 가본 적도 없다는 점과 그 와중에 현지에서는 관광 수입을 위해 줄리엣의 집을 만들었는데 원래 없던 베란다를 새로 만들었다는 사실. 테마파크 조성이라는 게 현대에만 있는 게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짐작해본다. 그 와중에 그 조그만 집에 다들 가겠다고 줄을 서고 있는 걸 보면 굳이 저길 왜 갈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독일에서 만난 많은 친구가 이태리 여행 중에 베로나가 제일 좋았다고 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건 맞지만 이탈리아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깊은 인상은 받을 수 없었다. 차라리 4개월 전에 갔던 베르가모가 훨씬 인상 깊었다. 베로나는 유명 관광지인데 뭐랄까 알맹이가 너무 적다고나 할까.


그런 베로나에 명물이라면 Arena를 꼽을 수 있다. 고대에는 3만명, 현재는 최대 22,000명까지 수용 가능한 규모로, 콜로세움보다도 더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오페라 아이다를 보게 됐다. 로마 시대 검투사가 결투를 벌이는 장소에서 오페라를 보는 건 참으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오페라하고는 인연이 없었던 나도 3시간이 넘는 공연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무런 줄거리 공부를 하고 가지 않아도 흥미로웠다고나 할까.

다음날 베로나 시내를 쓱 훑어보고 파도바로 넘어왔다. 사실, 파도바는 베로나보다도 더 들어보지 못했던 지라 큰 기대는 없었다. Santa Giustina, 성 유스티나 성당, 수도원에 도착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알고 보니 세계에서 9번째로 큰 성당. 루카 사도의 무덤이 있는 곳이자 초기 기독교 터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베네딕토회가 쇠락을 거듭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부터 다시 부흥할 수 있었는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 큰 성당에 미사에 오는 사람이라곤 대여섯 명에 불과할 정도로 다시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니 그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괴테는 이 성당에 도착하고는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나라 번역본은 찾지 못했다.)


“undoubtedly a large enough space underneath the arch of the sky urges in you such a strange sensation. A bounded infinity is more alluring to man than a starry sky. This is the essence that carries us out of ourselves, that is what intimately holds us into our own mortal condition. And for this it is, that I take great pleasure when visiting the Church of Santa Giustina. The abbey in its construction is so grandiose and yet so humble. Tonight I visited it again, I sat in a corner and peacefully I wondered as I was so perfectly lonely within my soul. No man in the world who would have had a thought for me, would have found me here.”

 


괴테가 이탈리아 기행을 쓰던 당시 이동하던 경로다.


* 레겐스부르크-뮌헨-인스부르크-볼자노-트렌토-베로나-비첸차-파도바-베니스-볼로냐-피렌체-아레조-페루자-아시시-로마-나폴리-시칠리아 등등.


 


지금의 기차길, 고속도로와도 비슷한 걸 볼 수 있다. 이 모든 게 로마 때 만들었던 길이겠지. 새삼 그 위대한 문명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각설.


어마어마한 수도원, 성당의 구석구석을 지나가면서 보다 보니 예전에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또 한편, 식당과 소성당을 보니,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분위기다. 해리포터 작가도 이런 성당, 영국에서의 성공회 성당을 보면서 그런 소설을 쓸 수 있었겠지 싶은 생각을 해본다.


몇몇 이태리 수사, 신부들은 인사를 안 받아줬는데 신부님 말에 따르면 모든 외국인한테 그런다고 한다. 사실 우리도 외국인하고 대화를 안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언어 때문일 수도 있고, 가끔은 그들은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뭐 어떤 이유에서건 잘 지내면 좋은 일일 텐데 아쉬운 일이다. 나의 이태리 친구들은 독일인들이 뭉쳐 다니면서 자기들이랑 안 논다고 불평하곤 했는데 너희도 똑같다는 이야기를 전해줄 예정이다. 어쩌면 이건 이태리 북부가 원래 이런 성격인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밀라노에서 봤던 깍쟁이들처럼.


신부님은 나를 Daniele라고 소개했는데, 한 나이 지긋하신 신부님께서 내 손을 붙잡고 반갑다며 파도바에 4대 성인이 있다고, 이는 유스티나, 안토니오, 다니엘레, 프로스도시무스라고 했다. 유럽 오고는 처음으로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려봤다. 나의 본명으로 불리는 것 외에 또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첫날 도착해 미사와 저녁기도를 드리고, 저녁 식사, 끝기도까지 마친 이후, 모든 수도사, 신부가 잠들고 불이 다 꺼진 수도원 밖을 나가 파도바 시내를 구경했다. 이틀간 밤낮으로 돌아다니니 또 밤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오히려 선선하게 순례자의 방에서 여유를 즐기는 게 더 좋다.

다음 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신부님과 미국 출신 수사님과 함께 시내 한 바퀴를 둘러보는데 낮엔 젊은 사람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이태리인들은 역시 야행성인가. 날씨 때문이라도 낮에 돌아다니기는 어렵지, 싶다.


지금 묵고 있는 수도원 앞의 광장은 유럽에서 제일 큰 광장이다. 그곳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파도바 대학이 나온다. 올해로 800주년, 갈릴레이가 교수로 재직했던 곳이기도 하다. 파도바는 현대, 중세, 그리고 고대까지. 시내를 걷다 보면 시간여행을 하는 듯하다. 시내 중심거리에서 조금 벗어나면 두 개의 큰 성당이 있다. 하나는 주교좌 성당, 또 하나는 성 안토니오 성당. 안토니오, 어린이와 빈민, 아픈 사람들의 성인. 우리나라에는 안토니오 성인이 유명하지 않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제일 사랑받는 성인이라고 한다. 해마다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이 찾는다고. 성당도 전형적인 로마네스크나 고딕양식보다는 터키나 러시아에서나 볼 법한 독특한 건축 양식이다. 안토니오 성인 무덤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비는 관광객이 많다.

 


또,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익숙한 수녀복을 보게 됐다. 한국 수녀님들인가 했는데 맞다. 심지어 신부님하고도 아는 사이. 로마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계신 수녀님 두 분과 청년을 만났다. 옆에 있는 미국인 수사는 내게 ‘Il Mondo Piccolo’라고 했다. 세상이 참 좁다는 이야기다. 살다 보면 그런 경우가 많지 않은가.


미국인 수사와 신부님은 이태리어로, 나는 영어로 이야기하는데 또 신부님과 나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니 서로 한 언어씩 못하는 셈이라며 서로 언어를 배우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외국인이 이태리어를 느릿느릿 말하는 걸 옆에서 들으니 오히려 배우는 단어가 더 많다.


미국인 수사는 본인이 미국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이 다른 언어를 쓸 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생각지 못했는데, 이태리어를 배우면서 그 어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확실히 미국 밖을 나오는 아메리칸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거만한 ‘양키’와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다른 세계를 더 배우려고 하는 겸손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본 미국인은 그랬다.


또 미국인 수사는 포도주에 조예가 아주 깊었는데, 미국 전역에서 와이너리 투어는 물론이고 이곳에서도 종종 투어를 다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이라면 점심을 굉장히 많이 먹고 저녁은 소식한다는 점. 스시 무한리필 집에 가서 끊임없이 시켰는데, 저녁에는 새 모이만큼 먹었다. 아시아 음식이라 더 많이 먹고 싶었나. 알 수 없다.


한편, 내가 공부하고 있는 그 학교에 있는 그 많은 가톨릭 신자 중에 오직 나 혼자 주일미사를 간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니 미국 수사는 잘하고 있다며, ‘네가 모신 성체로 예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니 나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울림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만큼 천주교 신자로서 선한 말과 행동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도 해보게 됐다.



다시 베네딕토회 수도원. 성당으로 돌아온다.


사실 규모는 이곳이 더 크지만, 이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이 더 유명하고 인기가 있다. 그곳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이라고.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아무래도 사회 참여적이고 더욱 개방적인 분위기인지라,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많고, 베네딕토회는 쇠퇴하고 있다고.


수도원마다 특징이 있는데, 베네딕토회는 규율을 중시하고 주어진 일과, 기도시간은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경향이 강하고, 다소 수직적인 구조. 즉 쉽게 말해, 군대랑 비슷하다. 프란치스코회는 그 반대의 성향을 띠는데, 수도원에 입회하는 사람들도 공동체 내에서 대화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프란치스코로, 조금 더 과묵한 성격은 베네딕토회로 온다고. 이미 한 수도원에 입적하게 되면 다른 수도회로 옮기는 게 원칙적으로는 가능은 하지만, 흔하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좁은 세계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매일 하는 기도는 성경의 시편으로 이뤄지는데, 이 시편은 총 150장이다. 이 150장을 어떤 수도회는 1주일에 다 마치기도 하고, 어떤 곳은 2주, 어떤 곳은 4주에 걸쳐 나눠서 기도한다. 1주만 하는 곳은 트라피스트회로, 베네딕토회가 타락했다고 하여 만든 공동체인데 더욱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성공적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고.


저녁밥을 먹으려면 저녁 미사와 저녁기도를 참석해야 한다는 신부님의 이야기에 오랜만에 미사를 보게 됐다. 이태리어로 하는 미사지만, 흐름을 따라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독일어로도 했는데 이태리어라고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따금씩 들었던 라틴어 미사를 떠올려 보니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지막 기도 시간에는 눈치로 수도사들이 하는 기도를 같이 따라불렀다.


다음날, 신부님은 두 번째 날이라 그랬는지 굳이 미사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도 가는 게 도리일 거로 생각해 가기로 했다. 역시 미사에선 큰 은총을 받는다. 어제보다 기도문도 더 익숙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된다. 이래서 사람들이 기도하고, 신부님, 수녀님, 수사님들이 성직 생활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20년 만에 이태리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시게 된 신부님은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슬프다고 하셨다. 이제는 어떻게 퇴장할지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국 천주교회는 아직까진 활발한 편이지만, 가톨릭의 심장인 이곳은 그렇지 않다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이곳 성당에도 사실 미사에 참가하는 신자는 대여섯 명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고작이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있는 수도사와 신부님도 열 명 남짓. 이보다 더 작은 성당은 아예 제대로 운영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신부님은 본인의 젊음을 다 바친 이 종교가 이렇게 되어버린 게 안타깝다며 무얼 위해 그렇게 살았나 회의감이 든다고도 하셨다. 사실 나 또한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젊은이들이 얼마나 종교와 담을 쌓고 지내는지 몸소 실감하기에 덧붙일 말이 없었다.


도심 속에 있는 수도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과, 사실 이곳의 수사들은 다른 건 몰라도 모든 기도, 미사를 빠짐없이 참가한다고. 신부님은 이런 점이 우리가 배울 점이라고 했다. 한국은 뭐한다 저거 한다,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사실 모든 성직자의 기본은 기도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한편, 식사 시간에도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을 보는 한 젊은 수사를 보며, 저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성직자라고 못할 건 없지만, 뭔가 바람직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도심 속에 있는 수도원, 속세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그런 사소한 행동이 어쩌면 수도 생활, 가톨릭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떠나는 마지막 날. 미국 수사와 아침에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수도원에 입회할 생각은 없었는지, 혹은 앞으로는 어떨지.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니, 본인의 인생에서도 큰 선택이었는데 그 선택에 굉장히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하느님도 우리 스스로가 제일 행복한 길을 하길 바라신다고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게 우리의 소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되면 더 좋은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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