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독 바다청년 Jan 17. 2023

바르샤바 여행기

폴란드의 역사와 미래를 생각하며


언젠가 한 번은 꼭 가고 싶었던 폴란드의 수도. 친한 친구가 교환학생을 하는 덕분에 방문한다.



폴란드의 뿌리. 최초 수도는 폴란드 남부에 있는 크라쿠프였다. 왕국의 팽창으로 바르샤바 등이 통합되고, Sigimund 3세에 의해 바르샤바로 수도가 옮겨진다. 그의 동상은 지금도 바르샤바 구시가지에 우뚝 솟아 있다. 당시, 그리고 지금의 폴란드 영토를 보면 바르샤바가 국토에 중앙에 있으니 그의 결정이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리투아니아와의 연방국으로 중-동부 유럽의 강자였던 폴란드는 서쪽의 군사 일변도 국가 프로이센, 남쪽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동쪽의 러시아에 의해 무너진다. 무려 1795년부터 1918년까지, 한 세기가 넘게 독립적인 폴란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에피소드로,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휩쓸 때, 폴란드는 바르샤바 공국의 위치로,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투를 하는데, 나폴레옹 패망 이후, 줄을 제대로 잘못 서는 바람에 프로이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삼국에 의해 분할되며 나라가 이전보다 더욱 갈기갈기 찢긴다.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고는, 유럽 대륙의 최강자가 되고, 당시 러시아도 건재했는데,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의 속국이었던 폴란드를 독일이 침략하게 된다. 밀고 밀리는 전쟁이 끝나자 이 힘의 균형의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독일을 유난히도 미워했던 프랑스의 입김 덕에 독일은 옛 프로이센의 영토, 많은 동부 지역을 폴란드에 내주게 된다. 실제로 본인들의 상대라고도 여기지 않았던 폴란드에 이런 수모를 당하는 걸 옛 프로이센 군인들은 당시 굉장히 분노해 소련과 군사훈련은 물론, 폴란드 침략에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폴란드는 이런 소련의 침략을 잘 방어해내며 동부 영토까지 확장했다. 전통적인 적의 영토를 많이 뺏었으니 그들의 원한도 많이 샀던 건 당연한 일. 한편, 이는 폴란드군, 정치인들이 본인들이 강대국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나치 독일이 야금야금 영토 획책을 하다가 이윽고 폴란드까지 탐내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침공할 시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협박했지만, 히틀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같이 침공한다. 당시 폴란드는 내부 쿠데타 및 잘못된 외교 정책 등으로 어리버리하고 있었으니, 양방향에서 오는 독일과 소련의 침략을 어찌 격퇴할 수 있겠는가. 약속했던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는 폴란드에 오지 않았고, 폴란드는 항전 끝 결국 항복한다. 독일과 소련은 이 폴란드를 양분하는데, 그 선이 그들의 외무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선이라고 부른다.


프랑스를 6주 만에 전쟁에서 배제한 독일은 영국까지 항복시키려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소련을 침공하게 된다. 이번에도 고통받는 건 폴란드. 소련 지배 아래 폴란드부터 쉽게 수복한 독일은 소련과의 처절한 전쟁을 이어간다. 그 와중에 나치의 영향 아래 있던 폴란드가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를 당했던 건 당연한 수순. 많은 수용소가 실제로 폴란드 영토에 위치한다.


그중 제일 처절했던 건 바르샤바. 바르샤바는 역사적으로도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그 당시 전인구의 30%를 차지했다고. 1943년, 히틀러의 최종 해결 (Endlösung / final solution), 유대인을 몰살 정책의 하나로 게토에서 강제 수용소로 옮기는 것에 대항한 첫 번째 봉기가 있었는데, 이 단일 사건으로 13,000명이 사망했다. 당시 6천 명은 산 채로 타 죽었었고, 생존한 5만 명은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 유대인 봉기였으며 폐허가 된 게토에서 수많은 사람이 처형됐다고.

두 번째 봉기는 1944년. 전쟁의 양상이 바뀌어 독일 영토를 차례로 수복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폴란드까지 이르렀다. 최초 계획은, 바르샤바 시내 내부에서 나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가 저항 활동을 시작하고, 이를 붉은 군대가 호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가전을 원치 않았던 소련군 탓에, 48시간으로 계획되었던 바르샤바 내 봉기는 63일간 이루어졌고, 저항을 이을 수 없었던 저항군은 나치에 항복하여 처참하게 몰살, 혹은 포로가 되었고, 도시에 남아 있던 15-20만 명의 시민은 도시 밖으로 방출되었으며 남아 있는 도시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파괴된다. 도시의 85%가 파괴됐고,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물품 모두 독일군에 의해 빼앗기게 된다. 유럽의 대도시 중 하나가 그야말로 절멸했다. 이 정도로까지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항이 사라진 시내를 소련군은 파괴된 바르샤바를 무혈입성했다.

연합국으로 망명정부를 세워 끝까지 독일에 대항한 폴란드는 종전 이후, 승전국의 위치를 받아서인지, 소련에 뺏긴 땅도 적진 않지만, 독일의 영토를 뺏고 서쪽으로 영토를 많이 확장했다. 또 한편, 공산권이었지만, 소비에트의 탄압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고, 서구와의 교류도 많은 편이었다. 이 또한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의 일화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던 그 시점. 바르샤바 공방전 기간 중 바르샤바 방송국은 확성기와 스피커를 통해 쇼팽의 음악을 도시 전역에 송출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셈. 그리고 바르샤바 방송국을 점령한 독일군은 바르샤바가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뜻에서 바그너의 곡을 송출했다고. 바그너가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유대인 차별 및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나치의 사상을 뒷받침했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한편, 독일 점령 동안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면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역사가 있는 두 나라의 관계는 한 인물의 역사적 행동으로 반전된다. 이는 비 오는 날,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에서 폭우 속에 눈물을 보이며 참회의 무릎을 꿇었던 당시 서독의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 의도된 정치적인 쇼였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논쟁 대상이었던 독일과 폴란드와의 국경 문제까지 일단락되었는 데다가, 유럽의 리더인 독일의 행보는 그 전의 독일과는 달라도 아주 달랐으니, 폴란드는 독일과 사이가 좋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폴란드인이었지만 독일 축구 국가대표를 지낸 클로제나 포돌스키도 있는 만큼.


그런 한편, 역사적인 또 다른 절대적인 적, 공산권 붕괴 이후에도 끝없는 팽창정책을 하는 러시아는 실질적 위협이자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또, 그런 한편 그것과 대조적으로 도심 내부 곳곳, 그리고 시내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수많은 공산주의식 건물, 도심 내 뉴욕의 Empire State Building을 연상시키는 가장 우뚝 서 있는 건물(Palace of Culture and Science)이 소련의 계획, 스탈린의 의도에 따라 세워진 건축물이라는 건 그들의 굴곡진 역사를 반영하는 듯하다.

한편, 또 다른 모습의 바르샤바. 이는 쇼팽의 고향.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요절했고, 살아생전에는 비교적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사후 낭만주의 음악의 한 거장으로 칭송받는 인물. 거의 모든 작품이 피아노곡인 게 특징인데, 음악이라곤 피아노밖에 모르는 내겐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너무나도 뜻깊었다.


쇼팽은 바르샤바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부분의 성인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내는데, 사후 심장만은 바르샤바로 옮겨왔다. 그 심장은 구시가지 중심거리에 있는 성당 내벽에 자리하고 있다. 바르샤바 봉기 이후 절멸에 가까운 나치의 시가지 파괴에도 심장만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는데, 이는 나치 친위대 사령관이 그전에 이를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

이외에도 바르샤바엔 모든 곳에서 쇼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당장 공항부터 쇼팽의 이름을 땄고, 시내 제일 큰 공원인 Lazienki 공원 초입부 그의 동상은 물론, 녹음된 그의 음악도 들을 수 있다. 이는 몇 년 전, 쇼팽 국제 콩쿨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연주했던 폴로네이즈였다. 이런 시설이 도시 내에도 군데군데 있다고. 한편, 공원 내 동상은 독일군의 바르샤바 점령 후, 파괴됐다가 다시 복원되어 있다고 적혀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충무공 명량대첩비가 일본군에 의해 훼손되었다거나 파괴되었다는 등의 내용과 너무나도 맞닿아 있다.

역사를 뒤로하고 현재 폴란드를 바라봤다. 바르샤바의 구시가지를 제외한 도심 자체는 최소 10년, 어쩌면 20년 전의 한국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마저도 산업 자체가 자국 내의 제조업보다는 서구권 굴지의 대기업이 상대적으로 임금이 적은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한 산업이란 게 느껴진달까. 도심 내 제일 큰 빌딩에 LG가 있는 것도 이를 상징하는 한 부분.

이런 모습은 1인당 GDP가 유사한 헝가리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과연 이러한 경제 정책이 자국 경쟁력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유럽연합에 가입하며 혜택을 본 것도 맞지만, 한편으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산업 강국에 피 빨리며 자국 산업이 성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지는 않을까 싶은 우려가 드는 이유다.


또, 독일 등 기타 서유럽 국가보다는 달리 너무 많은 자동차, 그물망처럼 연결되지 못한 다소 부실한 시내 교통체계 등 인프라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그들에게 후대 세대를 고려한 지속가능한 개념 등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국가 자체가 경제발전을 더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환경에 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적지 않은 폴란드인이 독일에서 일하려고 하고, 또 한편으론, 동유럽 내에선 선전하고 있는 그들이기에, 구공산권 국가의 이민자가 많이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도 든다.


러시아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사는 이 나라가 앞으로는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면서도, 먹고 살 만해져야 환경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 시스템으로는 기후 변화에 대한 답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더 강하게 했다. 우린 ‘이제 먹고 살 만하니까 이렇게 할 거야.’가 과연 ‘먹고 살 만하지 않은’ 국가들에 어떻게 비칠지 싶은 생각인 거다. 그래도 바로 독일 국경에 맞닿아 있고, 나름 1인당 GDP가 2만 달러에 육박하는 중견국이 그런 느낌이니 다른 곳은 어떠하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 도시 답사기: 아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