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독 바다청년 Apr 10. 2023

시칠리아 기행. 두번째

타오르미나 - 에트나 - 카타니아. 에필로그


다음날, 날이 밝아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타오르미나.


해변을 따라 쭉 이동하는데 전날 이동했던 길보다 훨씬 수월하다. 섬의 동쪽 끝 메시나에 도달할 땔 즈음, 저 멀리 이탈리아 대륙도 함께 보인다. 사실 시칠리아와 육지는 최단 거리로는 4km밖에 되지 않아 연결하려면 충분히 연결할 수 있는데, 섬사람들이 이를 원치 않아 연결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곳을 다른 곳에서 지켜보았다. 8년 전 당시, 나는 해군 순항훈련전단 생도 신분으로 이곳 메시나 해협을 지났었다. 당시 우리는 터키 이즈미르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의 항구 치비타베키아로 향하고 있었다. 기억하기론 함내 방송은 이러했다.


“본함은 현재 지중해를 거쳐 메시나 해협을 지나는 중. 관심 있는 승조원 총원은 참고할 것.“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곳을 다시 직접 차로 지나다니, 감격스럽다. 그렇게 그곳을 지나 타오르미나로 향한다. 시내에서 주차하는 건 역시 쉽지 않다. 시내에는 역시 그리스 극장 유적이 있다. 이 극장 뒤편을 보면 바다가, 앞쪽을 보면 이곳의 영산 에트나와 바다가 함께 보인다. 정말 장관이다.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입장료는 충분하다. 또 기억할만한 건 괴테 거리도 있는데, 이탈리아 사람들도 괴테를 잘 아는구나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타오르미나도 마찬가지로 다른 여타 도시들처럼 육지로부터 꽤 높은 곳에 자리한 도시인데, 그 역사를 살펴보니 섬 원주민들이 그리스인들을 피해 형성한 곳이라고 한다. 시라쿠사가 그리스인의 식민지였으니, 그들을 피하고자 건설된 도시였던 셈이다. 하지만 결국 이곳도 그리스인에게 넘어갔고, 그들 입맛대로 극장이 생긴 셈이다. 이 극장은 나중에 로마인에 의해 관리되어 로마인의 형식으로 변형되었다. 약육강식의 진리를 이곳에서 느낀다고나 할까. 그 로마도 멸망한 와중에 몇 차례 지진이 일어난 결과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사람들이 그 유적의 돌을 뜯어갔던 덕분에 우리는 바다와 화산의 광경을 더욱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숙소는 타오르미나 아래 도시, 낙소스다. 원래 원주민들이 이곳에 살다가 타오르미나로 거처를 옮겼다고 하니 다 비슷한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마치 광안리, 해운대의 풍경과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역시 세속의 때가 더 묻을수록 감동의 크기는 적어지는 법이다.

다음날.

시칠리아의 영산 에트나로 향한다. 차로 굽이굽이 올라가는데, 꽤 높은 곳에 몇몇 마을이 존재하는 걸 본다. 산에 가까워질수록 대자연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다.


4월 초중순에도 위에는 눈이 쌓여있다. 살면서 이렇게나 높은 곳을 운전으로 올라가 본 적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정상인 해발 3,300m까지 올라가기 위해선 케이블카를 타고 그곳에서 가이드 동행으로 봉고차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느껴진다. 이미 이곳에서 보는 화산재와 바위들도 경이롭다.


짧은 등산을 마치고 공항이 있는 카타니아로 향한다. 돌아가는 길엔 화산 폭발로 망가진 집들도 중간중간 보인다. 이 화산이 터져 50km가량 떨어진 카타니아까지 용암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카타니아는 팔레르모와 더불어 시칠리아 2대 도시다. 중심 거리의 건축물은 마치 로마 혹은 밀라노를 보는 것처럼 세련되어 있다. 중간중간 유적도 있는데, 이젠 이 모든 여행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 어떤 바다도, 그 어떤 건축물도 감동을 주진 않는다. 여행은 떠날 때 좋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집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저녁 늦게 밤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주말 저녁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부활절 전날 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거리에 너무나도 많다. 젊은이들은 성당에서의 미사와는 무관하게 오늘 하루 진탕 놀아보겠다는 심정으로 한껏 치장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그렇게 나는 우연히 대성당을 지나가다가 대성당 미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 미사는 전 세계 공통이라고 빛의 예식도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예식이 공통이라는 건 부활 성야 미사가 정말 길다는 것도 같다. 오후 10시 30분에 시작한 미사는 아마 자정을 넘어서까지 진행되었을 테다. 여독으로 길고 긴 독서 시간에 성당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공항에서 출발해 독일로 돌아간다. 시칠리아를 넘어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가 보이는데, 저 작은 섬에서 나폴레옹이 태어났구나 싶다. 이젠 알프스가 보인다. 참 맑은 날, 돌아가는 날까지 날씨가 너무나도 좋아 모든 게 감사하다.

언젠간 저 알프스를 오를 날도 있을까. 무엇이 됐든, 이번 여행이 내 인생 최고의 경험 중 하나였단 걸, 다시금 느낀다.


예전 생도 신분의 사진을 보니, 주름살이 많이 늘었다. 늘어난 주름살만큼 성숙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으며 일상으로 돌아가 본다.




에필로그.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다시 현대의 시칠리아가 모든 산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마치 죽은 건물이 많은 죽은 도시 같다는 게 떠오른다. 괴테는 팔레르모가 제일 아름답다고 했지만, 지금의 팔레르모는 200년 전 괴테가 봤던 그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테다. 마치 시네마 천국의 극장 할아버지가 토토에게 시칠리아를 떠나라고 말했던 게 이해가 간다고나 할까.


언젠가 밀라노 출신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탈리아는 안코나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서야 한다. 안코나로부터 북부는 유럽 대륙에, 그 아래에는 아프리카에 속했을 때, 로마는 아프리카 최고의 도시가 될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이야기에 모두 공감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그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지금 이탈리아의 격차는 해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시칠리아가 마피아의 고향이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부터다. 중앙 행정부가 밀라노를 비롯한 북부 중심의 정책을 펼칠 때, 남부는 수탈당했고, 그 권력의 공백에서 특정 세력이 주민들의 편이 되었던 게 마피아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이들이 힘을 키워 바다를 건너 미국까지 이른 셈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4박 5일간의 체류 동안 마피아 조직 일원을 셀 수도 없이 봤을 것이고 내가 확신에 차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그 친구는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이탈리아는 분명 프랑스보다 기술력도 뛰어나고 근면한데 왜 그들보다 항상 못 살고 임금도 적은지 이해를 할 수 없다. 대학도 우리가 더 낫고 문화도 우리가 낫다.”


그때 나는 “이탈리아는 네가 말한 것처럼 남북으로 격차가 심한데, 네가 사는 북부나 그러지, 로마 아래의 남부는 산업이 박살난 상태가 아니냐. 물론 프랑스도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겠지만, 이탈리아처럼 큰 지역을 통째로 포기한 상태로 방치하지는 않지 않냐.”


그제야 그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고 어느 날 또 생각하기를, 독일의 서부와 동부의 격차도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 이 격차도 이탈리아만큼이나 심각하며 해소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프랑스는 모르긴 몰라도 그 정도의 격차는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통일된 역사가 짧고, 그 통일의 과정이 이탈리아는 북부 중심의 통일이었고, 독일의 통일은 한 책에서 표현한 것처럼 단순히 ‘프로이센화’가 되어서였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니 국가 내에서도 제대로 된 통일을 이루기 어려운데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싶은 생각에 이른다. 그래서 EU 회의론자들은 미래가 없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칠리아 기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