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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생각

아버지의 잔소리

Festina Lente. Tolle Lege

by 송다니엘

아버지는 최근 몇달간 버릇처럼 Festina Lente라고 잔소리를 한다.


Make haste slowly. 천천히 서둘러라.

뭔 개소리인가 싶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이란다.


약관의 나이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임명되어 정적들과 전쟁을 치렀던 그가, 상대적으론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지만, 안정적으로 제국을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던 그의 주도면밀함을 먼저 떠올려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미래를 향하여 흘러가는 크로노스(Chronos)와 시간의 깊이를 나타내는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하여 생각했는데,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

더 짧게 하자면, 크로노스 = 시간, 카이로스 = 시각, 때


아우구스투스가 서두르라고 말한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상대적인 시간인 카이로스. 즉, 천천히 행동에 옮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운명을 정할 수 있는 카이로스,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서둘러 잡아야 한다는 말이라고 해석해본다.


고사성어로 한다면, 호랑이의 눈으로 보면서 소처럼 걸어간다는 호시우행(虎視牛行).


이어서 한 친구와 했던 이야기다. 내가 아우구스투스가 Festina Lente라는 말을 했다더라 하니,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난다면서 ‘Tolle Lege’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은 교부의 참회록에서 나오는 말로, 그런 그가 회개하는 시점에서의 말이다.

그 뜻은 “집어서 읽어라.”


그는 애초에 방탕한 삶을 살았다. 번민하는 그에게 성별을 알 수 없는 어린 아이의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는 그것이 성서를 펴놓고 최초로 눈에 띈 대목을 읽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임이 틀림없다고 깨닫고, 우연히 펼친 복음서의 한 구절,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너는 하늘에서 보화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라는 글을 보고, 이를 자신에 대한 가르침으로 판단하고, 이 분부를 따라 즉시 하느님에게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 그 다음엔 “폭식과 폭음과 음탕과 방종과 쟁론과 질투에 나아가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지어다. 또한 정욕을 위하여 육체를 섬기지 말지어다.”라는 성경 구절을 보았다고 한다.


교부는 여기서 “나는 더 읽으려 하지 않았으며, 읽을 필요가 없었다.”고 적어놓았다.


사람들은 앞뒤 문맥을 제외하고, 이 문장만 인용하여, 이 문구가 마치 책에 푹 빠져 살라고, 혹은 열심히 책을 읽겠다는 좌우명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부는 두 문장을 읽었을 뿐이다. 물론, 그에겐 인생을 바꿀만한 중요한 문장이었겠지만.


그래서 생각하기를, Festina Lente도 과연 아우구스투스가 한 말은 맞는지, 아니면 후대의 누군가가 그의 좌우명이라고 했을 것인지, 혹은 했다 한들, 다른 뜻으로 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내가 그렇게 해석하고, 내 뜻을 다잡은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결국 이를 다 잡고 생각해본다.


살면서 중요한 문장이 꽤 있었는데 오늘따라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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