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과 자유, 그리고 술맛.
2년 전에 워낙 유명한 드라마였는데, 드라마 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여 볼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40분 가량의 요약된 동영상을 보고 나니 보고 싶어졌다. 극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전형적인 우리나라 드라마의 요소가 섞여 있어 다소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이따금 나오는 메시지가 너무나도 인상 깊었다. 고교 퇴학, 수감생활, 원양어선, 개고생 끝에 연 첫 가게의 영업정지 등등. 다소 과장된 설정이지만 극 중 주인공이 소신을 지키기 위해 타협을 불사하고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할까.
주인공의 아버지 가르침이 인상 깊다. 본인 평생 직장의 회장의 아들을 본인 아들이 때려서 퇴학되니 마니 하는 상황에서 아들의 소신을 지지해주는 모습. 이미 수십년을 현실에 찌들어 살았음에도 그 소신을 잃지 않고, 퇴사하겠다는 그 모습. 그걸 보고, 회장은 그 아버지에게 젊다는 표현을 쓴다.
어쩌면 젊은 거다. 패기 넘치고 손해를 보더라도 가치를 지키려는 모습. 살아갈수록 그런 혈기왕성한 패기, 소신, 객기는 옅어진다. 그런 아들에게 가훈이 “소신 있게 살자.”였지만,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잘했다고, 멋지게 살고 있다고 당부해주는 모습. 클리셰지만, 뭉클했다.
시간을 돌려 1년 반 전으로 돌아가 본다. 5년 차 전역을 위한 심사라니. 나가고 싶은 사람도 위원회를 거쳐야지만 그만둘 수 있는 현실에 부들부들하면서도 나름대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던 순간들. 면접 대본 비스무리한 글을 아버지께 보여주고 혼났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그래도 해군사관학교 졸업하고 5년이나 장교로 복무한 이가 군을 떠나는데 이런 식으로 면접을 해선 되겠냐고. 소위 말해서 전역 안 시켜주면 깽판 치겠다는 이야기를 적어놓은 게 참으로 못마땅하다며 내게 실망했다고 하였다.
당시 친한 선배에게 그런 고민을 전하니, 그래 놓고 5년 차에 전역 안 되면 5년 더 있어야 하는데 네가 생각하는 원칙 때문에 전역이 안 되면 그 때 가서 후회할 것이냐며 이야기를 했었는데, 결과론적으로는 나는 그 위원회에서 깽판을 치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이것은 어쩌면 더욱 중요한 일이며, 앞으로 군 조직에서 하고 싶은 일이 없고,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고만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 이후에 했던 이야기가 떠나는 이의 모습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거였는데, 이는 그것이 이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이고, 그러고도 전역이 안 되면 받아들여야지 어떡하겠냐며 했었다. 그때는 그 이야기가 참으로 무책임하다고 느꼈는데, 아버지의 삶에서도 그렇게 억울하고 아쉬운 일이 얼마나 많았겠냐는 생각을 지금 와서 다시 해보니, 그것도 인생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었다. 이런 것이 가치를 지키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극 중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한다.
"지금 한번! 지금만 한번. 마지막으로 한번. 또 한번. 그 한번들로 사람은 변해가는 거야.“
서른 가까이 사는 이 순간까지 매 순간 정의로웠다고, 매번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을 했다고 떳떳하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그 중요한 순간들마다 최선을 다해 그런 바보 같은 원칙, 가치를 지키려고 손해 보고 살았다고 생각해본다. 극 중 아버지의 가훈처럼 우리 아버지가 조금만 취하면 하는 ‘쪽팔리게 살지 말자.’는 이야기가 똑같다고 느껴진다. 비슷한 맥락이다.
드라마가 방영된 일자를 확인해보니, 2년 전에 한창 독일문화원을 다닐 때였다. 미래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게 좋으면서도 왔다 갔다. 버겁다는 생각도 했었다. 2년이 지난 지금, 이제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느리지만, 단계를 밟아가고 있고, 지향하는 바가 있다. 그동안 쉽지 않았던 나의 삶을 이 상업적인 드라마에 대입해봤다.
“제가 원하는 건 자유입니다. 누구도 저와 제 사람들을 건들지 못하도록 제 말 행동에 힘이 실리고, 어떤 부당함도,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는, 제 삶의 주체가 저인 게 당연한, 소신의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나는 이런 자유를 얻기 위해, 소신을 지켜보고자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그 자유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경제적인 자립도만 제외하고는. 그것도 어쩌면 가까워지는 것이겠지.
극 중 아버지가 아들에게 했던 말이다.
“술 맛이 어떠냐.”
“달아요.”
“오늘 하루가 인상적이었다는 거야.”
소주 한잔을 기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