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존재의 사이
누구나 ‘밥’과 ‘존재’ 사이에서 줄타기한다. 이 피할 수 없는 외길, 사람들은 이 둘 사이의 어딘가에서 살아가는데, 완전히 한쪽을 버릴 수는 없다. 나 또한 그렇다.
와전된 말이긴 하지만,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찬성하지 않으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렇다면 미친 거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젊을 땐 사회의 잘못된 것에 대해 더 분노하고 이를 개선하는 데 더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반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보수화된다는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사관학교를 다니면서 ‘밥’ 걱정은 할 일이 없었기에 난 이상주의자와 비슷한 생각을 하곤 했다. 생도들에게 그런 이념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기에, 모순적인 나의 처지 때문에 나는 더 이에 분노하고 더욱더 이상을 꿈꿨다. 일례로, 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후 몇 년까지만 해도 난 불로소득이 부도덕하고, 노동 자체가 신성하다고 여겼다. 기형적인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이 언젠간 붕괴해야 한다고 믿으며, 동기들 혹은 같은 배를 타는 전우들이 재테크를 외칠 때도 군인이 그래서 되겠냐며 일갈도 했었다. 참 철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변한 건 이 사회, 조직에 적응되어가면서부터였다. 일이 익숙해지고 조직 내에서 나의 전문성도 갖춰나갈 땔 즈음, 그리고 이와 맞물려 실질적인 미래를 고민할 땔 즈음. 그제서야 현실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겐 돈이란 건 쓰지 않으면 모이는 성격의 것이었는데, 결혼을 하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혹은 전역할 때 돈은 얼마나 필요한지. 이로부터 비롯하여, 어느 순간 씀씀이가 커지면서 내 월급이 넉넉하지 않다는 걸 처음 느끼기도 했다. 월급은 늘었는데 오히려 부족한 아이러니한 상황.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었다.
3년간 함정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전역하겠다고 마음먹고는 상대적으로 편한 육상 보직을 발령받았다. 이때부터 서울을 오가며 그동안 살던 세상과 다르다는 걸 몸소 체험한다. 이는 근무지가 지방이어서 그럴 수도, 혹은 폐쇄적인 함정 생활 덕에 그럴 수도, 그랬기에 더 내가 책에 경도되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
매일 같이 부동산과 주식 이야기를 들으며 그제서야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한다. 종교적인 이유, 혹은 개인의 아집 및 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나의 이상주의는 산산이 조각났다. 수단보다는 양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고, 전역을 앞두고는 완전히 달라진 내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이상은 현실과 타협했다. 불로소득의 인정을 넘어 실제로 많은 실천에 옮겼다.
한편 그런 경제적인 타협과는 별개로, 나의 이상주의는 진로에서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이상주의의 일환으로 쉽지 않은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시작의 뜻은 이상주의면서도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는 나의 상황에 매번 번뇌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적었냐고.
항상 이상적인, 그리고 쓸모있는 일을 하고 싶은 나의 바람과 달리 당장 내가 이를 하는일은 없었다. 쪼들리는 상황이니 어머니는 매번 내게 뭐라도 소일거리로 해보라고 한다. 누군가는 ‘그래. 돈도 없는 놈이 이거라도 해야지.’ 라고 할 수도 있는데, 5분 정도 그걸 하는데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온다.
반복적인 작업을 하다 보니 지난 5년간 혐오했던 나의 일들이 떠올랐다. 월급 받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끔찍이도 싫어서 식빵식빵 하며 보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사실, 잠깐 맡았던 중학교에서의 업무에서도 이런 행정업무가 너무나도 싫었다. 넌 뭐 그리 대단한 일 하겠다는거냐 물을 수 있다. 사실 이런 것 때문에 조직에서 일 하는 게 싫었고, 다른 길을 찾았던 것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과연 효율적인 방법인가. 혹은 이걸 꼭 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그냥 하기 싫어서 불평불만 하는 건가. 난 그 데이터베이스를 옮기며 몇 천원을 벌었을 지도 모른다. 하여간 어릴 때부터 투덜거리던 게 이렇게까지 이어진다.
결국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군대에서 전역한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단순한 행정작업을 하기 싫어서였다. 굳이 이걸 내게 제안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진짜 돈이 목적이라면 지금이라도 주식이던 코인이던 한탕 해보겠다.” 등등 불평불만, 어리광을 부렸다.
어찌됐든 우리는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간다. 가끔은 이상을 좇아가는 날 보며 격려하고 싶고 잘했다고 칭찬하면서도 미친놈, 정신 못차렸다고 욕하기도 한다. 그래도 항상 꿈 꾸고 더 뭔가 더 큰 걸 해내고 싶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냥 노는 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뭐라도 해야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