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 관하여
우리는 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산다. 혁명은 무엇인가. 먼저 혁명의 어원으로 돌아가면 “천체가 출발한 지점을 복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이란 세기의 흐름에서 단절되어 원래 질서로 복귀한다는 것이자 혁명이란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개혁이 위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아래로부터 강제되는 것이다. 개혁은 시간적으로 길게 펼쳐진 혁명이 아니며, 개혁과 혁명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내용을 통해 구별된다. 진정한 혁명은 단지 기존 국가 기구의 파괴뿐만 아니라, 국가기구를 지배하는 사회 조직과 원리들의 탈구조화까지 포함한다. 그리하여 혁명이란 오직 사회혁명만이 있을 뿐이다. 쿠데타는 혁명이 아니다.
- 프랑스 혁명사(2018), 알베르 소불
혁명에는 반혁명, 즉 구체제로 복구하려는 움직임도 있기 마련이고, 이런 혼란 속에 필연적으로 무질서 속에 희생을 낳는다. 희생의 주체는 비단 특권계급층이 아니라 범인일수도, 혹은 범인들이 보기에 훌륭한 사람인 경우도 많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다. 어찌됐든, 피비린내 나는 혁명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격동의 시기에 뒤이어 안정의 시기가 도래하면, 또다시 어떤 누군가가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기 마련이다.
결국 아래에서 시작한다는 혁명이지만, 바뀐 건 지배계급밖에 없다.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혁명의 본래 개념에서는 틀린 개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선거도 하나의 혁명일 수도 있다. 아래에서부터 권력 기구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니. 하지만, 이 또한, 의미 있는 결과가 되는 건 전무하다. 이것이 혁명이 아니어서일까, 혹은 애초에 혁명의 속성이 그런걸까. 세상의 모든 것을 뒤집어놓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200여년 전, 모든 것을 낡은 정부를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낡은 사회 형태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프랑스 혁명이 그저 지배계급의 교체로 바뀌는 미완의 혁명이었고, 러시아 혁명 마찬가지로 새로운 지배계급을 만들었고, 그 체제는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붕괴했다. 200여년 전부터 염원해오던 향유의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혁명이 미완인 것과 같이 혁명 그 자체도 이성의 법칙에 부합하는 완벽하고 변함없는 체제의 즉각적인 창설을 이끄는 유례없는 폭발이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먼 길, 즉 하나의 발전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로 돌아온다.
시스템을 비난 또는 비판하는 건 쉽다. 현상에 대해 잘못된 것만 열심히 성토하면 끝이다. 훨씬 더 어려운 건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개 정부, 체제에 대해 비판한다. 정부, 체제에서 잘못된 일은 말해도 끝이 없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 욕하는 건 쉽다. 근데 막상 그 자리에 본인이 서면 욕했던 사람만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 못한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본다. 안타깝지만, 그 사례를 우리는 지난 몇 달간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진보의 화양연화는 보수가 정권을 잡았을 때다. 정작 본인들이 권력을 잡으니 5년간 지리멸렬해 손에 꼽게 해낸 일이 없다. 다시 바뀐 5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보니, 상대편도 지리멸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내 이 기간은 다시 그들의 화양연화가 될 것이다. 이렇게 갈지자로 하다 보면 또 몇십 년이 지나있을 테다. 삶이란 게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단순히 비판하는 걸 넘어서는 새로운 제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될까.
뭐가 되려는지는 모르지만, 단순히 비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는 움직임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돼. 욕만 하다가는 바뀌는 게 하나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올바른, 하나의 발전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