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동해안. 강릉과 비슷한 뤼벡
뤼벡 중앙역에서 내려, 구시가지는 일종의 섬에 있는 편인데, 그 주위를 물이 둘러싸고 있다. 이 물이 발트해, 독일의 동해로 통하는데, 독일 한자동맹의 중심이었던지라 건물들이 굉장히 높고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600~700년 전만 해도 여기가 돈을 긁어모았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렇게 한때 융성했던 중세 항구도시의 밤거리를 거닌다. 함부르크와는 다르게 관광객이 거의 없고, 한적함이 퍽 마음에 들었다. 바닷가까지 왔으니 해산물을 먹어 보기로 한다. 아쉽게도 내가 원했던 홍합탕 내지는 신선한 해산물은 없었다. 이건 지중해에 가야 맛볼 수 있는 걸까. 그래도 훌륭한 연어구이를 먹었다.
다음날, 원래는 시내를 구경할까 하다가 문을 연 박물관이 없어 고민하던 와중, 독일의 동해, 발트해로 향하는 버스를 즉흥적으로 잡아탔다. 원래는 배를 타고 가면 더 좋았겠거니 싶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방문한 월요일만 쉬는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탄 버스는 바다를 향하는데, 항구 도시 내에 있는 운하 내지는 강물이 아니라 정말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가 보인다.
정말 바다의 풍경이 펼쳐지니 그렇게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바다를 그리워한 건 해군에서의 삶이 강렬해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내 특성이 그런 걸까. 저 바다로 뻗어가면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나오겠지 싶다. 그래도 차마 이곳의 특산물인 정어리 빵은 먹고 싶지 않다. 백사장에서 좀 누워있기도 하고, 바다를 구경하고 다시 뤼벡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뤼벡을 더 구경하고 싶은 욕구가 밀려온다. 먼저 뤼벡의 대성당부터 들어가보기로 한다. 뤼벡은 뾰족한 탑이 7개나 있어 Sieben Türme (Seven Towers)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 일곱 개중 두 개가 대성당에 있다. 이 성당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가지 못해 탑도 무너지고 성당 자체가 완전히 붕괴했었다. 복원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또 복원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과 별개로 바닷가에 있는 이유로 부식도 더 빠르고, 지반도 불안한 모양이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박물관을 가기로 한다. 먼저 귄터 그라스. 독일 오기 전 양철북을 읽었던 것을 기억해본다. 그의 고향은 단치히, 지금의 폴란드의 그단스크인데, 한자동맹의 다른 중심지인 뤼벡에서 여생을 살았다. 뤼벡이 마치 본인 고향과 비슷하다고 느꼈단다. 강렬하게 봤던 그의 소설, 그리고 영화까지 여러 종류의 전시가 있었다. 그림을 꽤나 수준급으로 그렸던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2차세계대전 말 열일곱의 나이에 나치 무장친위대 (SS, Schutzstaffel) 입단했고, 그런 이유로 미국 수용소에 포로로 갇히기도 했다. 그는 그제서야, 이 모든 전쟁이 부정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하는데 그런 문제 의식 덕에, 양철북 같은 소설이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그저 나치만이 나쁜 게 아니라 힘없는 이들의 비겁함 내지는 부정함에 대해 다룬 이야기다. 물론 이런 그의 소설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벨상을 받은 문학이지만, 독일 전 국민에게 ‘나치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책임이 있어.’ 하는 말을 누가 그리 듣고 싶을까. 그것도 전쟁이 끝난 지 고작 15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독일이 지금처럼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전쟁의 참화를 이제 막 벗어날 때였으니.
아무튼 이 소설로 이는 세계적인 문학가가 된 그는 노벨문학상을 탔다. 목소리가 커진 이후엔 그는 상당히 진보적인 인사로 활동했는데, 서독의 동방정책을 이끌던 빌리브란트를 흠모해 뤼벡으로 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2000년대, 독일 내 금기인, 이스라엘의 군사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진보 그 자체였던 그의 삶을 보고선, 이제 또 다른 독일 내 전설적인 인물인 빌리 브란트의 전시관을 간다. 뤼벡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의 복잡다단한 가정사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서전을 내기 전까지만 해도 대중들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1930년대 초반, 10대부터 열성적인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빌리 브란트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노르웨이로 달아났는데, 그 바다가 내가 몇 시간 전에 봤던 항구, 바다임을 알게 됐다. 뭐 당연히 뤼벡에서 도망갔으니 이 항구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마는.
지금은 독일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그의 정치적 행보를 전시를 따라 보니, 이 모든 평가가 독일이 통일했기 때문이었다고 느낀다. 동독의 간첩이었던 그의 비서, 긴장 완화를 위한 동독을 향한 적극적인 지원 정책, 그것과 별개로 경제 정책에서의 실패와 동시에 난잡한 사생활까지. 어쩌면 현대의 평가와 별개로 그는 사실 인간으로선 대단히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에 비해 세상을 떠난 김대중 대통령이 지금도 보수진영에서 까이는 걸 보면, 우리나라의 많은 문제가 분단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한편, 독일의 지금의 수많은 진보적인,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많은 제도도 그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많은 진보 정치의 대부격이라고 느껴진다. 지금도 독일의 총리가 사민당의 총재이긴 하나 그 권력이 위태위태한 걸 보면 카리스마적인 정치인은 이제 나오지 않는가 싶은데, 이는 우리의 민주당이 김대중, 노무현 이후의 리더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한다. 브란트 이후 사민당의 총리였던 슈뢰더가 여러 부패 스캔들 이후 퇴진하고 메르켈의 정부에 자리를 뺏겼던 것까지 생각해보면.
지금 독일의 경제기후부 장관이자 부총리인 로베르트 하벡도 이곳 출신이다. 독일 정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혹 녹색당이 최대 집권정당이 된다면, 그가 총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두고 볼 일이다.
빌리 브란트 박물관에 이어 또다른 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이번엔 한자 동맹에 관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아주 현대적인 건물과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는데, 꽤 흥미로웠다. 사실 모든 한자동맹, 경제 공동체의 시작은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Новгород, Novgorod)이다.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굉장히 흥미로웠다. 지금의 러시아의 땅에서 강을 따라 발트해를 지나 뤼벡 등의 도시와 모피 등을 교환한 게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북독일,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 벨기에 등으로의 무역 동맹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건 바이킹 후예들의 항해술이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세상에 역시 영원한 건 없다 하지 않았는가. 12세기부터 시작한 무역은 한때 대단한 위세를 떨쳤으나, 16~17세기 들어 전염병(페스트)와 30년 전쟁의 여파로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원래 도시를 번갈아 가며 대표단이 모임을 했지만, 1669년 뤼벡에서의 모임을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의 종지부를 찍었다. 사실 신대륙의 발견도 그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서양 교역로가 무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은 한참 이후라고 하니, 위의 서술한 이유가 한자동맹의 주된 쇠락의 원인이 되겠다. 이런 걸 보면, 꼭 유럽이 세계를 정복한 것뿐만 아니라 정말 총균쇠가 인류 역사의 중심이었단 생각도 들게 한다. 결국 국민국가의 등장과 군사력 부족이 이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으니.
뤼벡은 흥미로운 박물관 이외에도 참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독일 짬밥 3년에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이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에 대해 나도 정말 놀랐다. 이제 뤼벡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함부르크로 내려가기로 한다. 역시 독일의 제2도시인만큼 사람이 정말 많다. 나도 참 시골쥐가 다 됐다. 대도시의 분주함이 괴롭기도 하지만, 야경이 아름답긴 하다.
1년 전쯤 우리 해군이 왔을 때 방문했던 항구 앞을 찾아갔다. 다시금 생각하기를, 이런 항구에 우리 해군이 정박한다는 게 참으로 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젠 9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그 해군의 일원으로 세계일주를 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내가 자유인으로 이곳을 돌아다니며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