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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다니엘 Nov 17. 2024

제일 ‘논란’이 많은 철학자, 니체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와 진실.


니체의 삶을 오랜 시간만에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완독하고 두 달은 지났을까. 힘에의 의지, 그가 경멸했던 기독교, 그의 모든 이론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세계를 파멸로 이끈 이론으로 널리 사용됐다는 아이러니함 등등에 대해 정리해본다.


21세기엔 그의 이론을 몇몇 이들이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퇴폐적인 방식으로 남용하는 것을 심심찮게 본다. 니체 말을 인용하자면 그런 “악”이 나약함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도덕 규범으로서는 그 자의적인 해석을 긍정적으로만 평가만을 할 수 없는 게 그런 이들이 너무나 많고 자주 보이는 데다가, 이를 누군가가 악용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러 매체를 통해.




먼저, 그의 핵심 사상인 힘에의 의지를 살펴본다. 이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 의식을 녹여낸 것이자 당시 다윈주의로부터 발현되는 허무주의에 대한 응답, 이에 대한 새로운 세계상을 만드려는 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니체주의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니체는 다윈 이후에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과제를 자신에게 부여했다.”


이 다윈발 허무주의에 대해 조금 더 서술하자면,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파생된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철학적 기조라고 할 수 있는데, 니체는 인간이 기타 다른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서술한다.


"다윈은 고차적인 동물들과 인간이 전적으로 개체들 안에서 우연한 변이를 거쳐 진화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니체가 보기에 자연선택은 본질적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함의도 없는 진화였다. (...)

다윈의 발견 이후, 방향을 설정하는 힘을 상정할 필요성은 사라졌고, 질서처럼 보였던 것은 임의적인 변화로 설명될 수 있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세계의 총체적인 본성은 (...) 영원한 카오스다.” 라고 썼다."


“심지어 거대한 사악함이 약함보다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죄악이 있는 곳에는 또한 거대한 활력과 거대한 힘에의 의지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일이 지상에서 가장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기도 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힘에의 의지를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충동이라고 보았다. 가장 어려운 과업에는 강력한 힘에의 의지가 필요하며, 따라서 강하면서도 통제되지 않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 사람은, 힘에의 의지가 약한 사람보다도 더 “위험”할 지라도 더 바람직하다.


“선”은 승화된 “악”이므로, 악은 긍정적인 가치를 가진다. 악한 충동을 없애버린다고 해서 선이 남지는 않을 것이다. 선 역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좋은 에리스”를 파멸하는 것은 곧 인류를 파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경쟁을 통하여 오늘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니체가 찬양했던 사람은 힘에의 의지가 강하지만, 그것을 창조성으로 승화한 자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된” 자들, 곧 초인이다.“




우린 이 힘에의 의지, 초인에 대해 때때로 잘못된 해석을 하기도 한다. 니체도 당시 독일 지식인 사이에서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많은 문제를 인지하고 큰 우려를 표했는데, 그게 아이러니하게도세대를 거쳐 반유대주의의 대표격인 나치가 그의 사상을 악용하게 된다.

사실 니체는 체사레 보르자와 같은 악인을 찬양한 게 아니라 사악함을 극복하고 선으로 나아간 초인에 대해 찬양한 것인데, 이를 악인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악용한 셈이다.


어쨌든, 니체의 사상, 힘에의 의지를 통해 우린 다윈주의로부터 비롯된 허무주의에 응답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힘을 갈망하지만, 자기 자신에 행사하는 힘을 갈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기 지배”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 다윈이 지워 버린 인간과 동물의 차별성이 초자연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은 채 다시 복원됐다."




한편, 그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아주 신랄하다.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았던 내가, 독일로 터전을 옮기면서 했던 수많은 의문과 회의에 대해 그가 대답하는 듯하다.


“우리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역사를 자유롭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과 대립하는 무수한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관습과 편견의 굴레에 매여 있어서, 그때의 인상으로 지성(Geist)의 발전이 가로막히고, (...) 종교와 기독교에 대해서 당파심을 벗어나 시대의 욕구에 부합하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각을 취하려 할 때는 마치 죄를 범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 같은 시도는 하나의 과업이다.”


다음은 그의 배교에 동요된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다.

“은총을 주는 것은 믿음이지, 믿음 뒤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진실한 믿음은 결코 속이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을 지닌 자가 믿음 안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을 얻게 해 주지. 그러나 진실한 믿음은 객관적 진리를 입증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여기에서 인간의 길이 나뉜다. 만일 네가 영혼과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하지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질문해라.”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배교할 일은 없을 테다. 니체 자신 또한, 결론이나 통념을 따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의 상태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생각하기에는 종교도 그가 비판했던 것과 별개로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수많은 변화가 오히려 종교의 근본을 더 흔들지도 모를 일이다.


예컨대 지금도 가톨릭 내부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인권이 더 중시되고, 기후변화부터 수많은 전쟁까지 단순히 누군가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교회 내 목소리도 일치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나가는 모양새다.


이런 측면에서 독일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더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이곳만큼 유럽에서 진보적인 사상이 보편화된 곳이 많이 없기에 그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런 기반에는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테고, 독일 교회 스스로도 비판하기를 즐겨하는 독일인, 독일 신자들을 잃지 않기 위해 하려는 노력의 산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반면, 아직 이에 비해 신자들의 충성심이 높은 우리나라 교회는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우리나라 교회가 그런 이슈를 다뤘다가는 외려 집토끼들이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고, 꼭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인식이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마지막으로 니체에 대한 작가의 평가를 덧붙인다.

"그는 20세기가 “허무주의의 증대”의 세기이자 낡은 세계의 질서가 붕괴하는 세기이며, “신의 죽음”과 도덕적 구속력의 소멸의 결과로 나타난 “전형적인 거대 정치”와 “전쟁의 시대”이며, 또 20세기에 와서 힘에의 의지는 19세기의 제약들로부터 완전히 풀려나, 순화되지도 억제되지도 않은 채 도처에서 권력의 수단들을 포착하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저 가증스러운 반유대주의”는 최악의 허무주의적인 범죄를 위한 기회와 동기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예견했었다. 외적인 만족을 박탈당한, 강력한 힘에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파괴를 의지할 것이라는 그의 이론은, 결국 절망하고 좌절한 독일 제국의 의해 끔찍할 정도로 철저하게 증명되었다.“


“니체가 죽은 후 한 세기 가량 우리는 그가 “신성하다”고, 그리고 더 자주 “사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일부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바그너주의”처럼 “니체주의”도 죽었다. (...)

그의 인생과 사유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실험이었고, 양자 모두 논리적 결론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파헤쳐지는 한 그것들을 스스로 정당화되며 어떠한 변호도 필요치 않다."


난 내 나름대로 규범을 정하고, 내 분야에서 ”선“한 영향력을 팽창하려는 노력을 계속 해나가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힘에의 의지이고, 평생을 살아가며 이루고자 할 지향점이 되겠다.




에필로그.

그가 젊은 시절부터 학문으로서 큰 성취를 얻으려고 했던 글은 큰 촉매가 된다. 미약하긴 하지만, 나의 학위논문이 마무리될 때에도 비스무리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으로 하나의 책을 완성했다는 뿌듯함과 같은.


"어쨌든, 작은 책을 쓰고 그것을 스스로 읽어 보는 것이 언제나 나의 소망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한 후 니체는 큰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느꼈다. 포르타 공립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그의 내면에서 축적된 그만의 독특한 문제 의식과 글쓰기 방식은 마침내 이 책에서 정열적으로 표현됐다. 그 결과 그에게 찾아온 것은 지독한 피로가 아닌 자유와 새로운 활력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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