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힘은 위대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내게 커다란 힘과 영감을 준다. 내게 제일 필요한 순간에 정말 맞는 이야기를 던져 주었다. 이건 어쩌면 문학의 위대함 뿐만 아니라 기적과도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독일 문학. 최초엔 괴테의 몇몇 책에 관심을 가졌었다. 괴테가 독일 문학의 정수라고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독일을 이해한다는 생각으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등을 보려고 했다. 전자는 완독했고, 후자는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해 포기했다.
그러고 헤르만 헤세를 다시금 생각했다. 데미안 외 그의 책들을. 한국에서도 몇몇 이들이 수레바퀴 아래서나 싯다르타를 읽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기회가 되면 접해보겠다는 생각 중에, 튀빙엔에 머물 당시 헤세가 사서로 일했던 공간을 우연히 가보게 되었다.
독일로 삶의 터전을 바꾼 지 2년이 넘었다. 예전엔 익숙지 않았을 책의 지명이 내겐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 익숙한 지명은 이름으로 그치지 않고, 그 자연환경과 건축 양식, 심지어 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도 가늠하게 한다. 소설의 배경인 독일 남서부 검은숲의 한적한 시골 풍경이 어떤 것인지 내겐 정확히 와닿는다. 작가의 생각도 어쩌면 그래서 더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 한스는 그 한적한 시골에선 눈에 띄는 영재로, 다소 허영심이 많은 아버지를 두고 있다. 학문의 순수한 열정이 있었던 그는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 이들의 이끌림으로 당시 영재, 수재들이 가는 신학교에 입학한다.
소설에선 이를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이제 이들은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기만 하면, 죽는 날까지 국가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선물이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스는 최초엔 우등생으로 학업을 이어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학업에 흥미를 잃고 신경쇠약에 걸린다. 안타까운 건 그 소년이 원래 즐거워하던 낚시, 자연, 심지어는 순수한 학문에 대한 흥미마저도 그곳에선 성취될 수 없었던 점이다.
마치 신학교 입학 전의 서술처럼.
“어린 소년의 아름답고 자유로운, 거친 즐거움이 그토록 멀어져 간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신학교에서 병가 내지는 퇴학 조치를 받고, 일련의 사건 끝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제목을 다시금 살펴본다.
수레바퀴 아래서, 독일어로는 Unterm Rad. Unterm은 아래를 뜻하는 Unter와 관사인 dem을 합친 말이다. 물론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아무튼, 여기서 수레바퀴 아래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
신학교 교장은 우등생이었던 한스가 학업에 집중하지 못할 당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옮긴이의 해설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있다.
“우리는 때로 권위적인 기성 사회의 무게에 눌리기도 하고, 때로는 주위 사람들의 질시와 미움의 무게에 눌리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커다란 감정의 무게에 눌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저자, 헤르만 헤세가 그 주인공을 대변한다. 그는 어린 나이 신학교를 도망치듯 떠났다. 신학교를 떠나고 방황하다가 끝내 소설가가 되었고, 지금도 읽히는 소설을 편 대가가 되었다.
나는 모두 각자의 삶에 수레바퀴가 있다고 믿는다. 주변의 환경이 너무 괴롭고 떠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다만, 결국 그 수레바퀴에 깔리거나 수레를 내던지고 도망가거나 혹은 그 수레를 끌고 가느냐의 차이라고 믿는다. 그 환경은 억압받는 학교가 될 수 있고, 가정일 수도 있고, 회사일 수도 있다.
신학교를 입학했을 때 소설에서 서술한 것처럼 세상에 대가 없는 선물은 없다. 그 대가는 수레바퀴이다. 개인적으로는 군복을 벗은 후로, 수레바퀴를 벗어났다고 생각했거늘, 그 수레바퀴가 나를 계속 눌러왔고, 사실은 그 수레바퀴를 던져낼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이젠 그 어떤 수레바퀴에도 깔리지 않고 던지고 나아갈 것임을 다짐한다.
한편, 옮긴이의 말처럼 헤세가 끝내 추구했던 “지성과 감성의 결속”, “현실과 이상의 융합”을 생각한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있어야 할진대 독일 생활 내내 이성만을 키우려고 했던 내가 수레바퀴에 깔렸던 건 아닌지 성찰해본다. 앞으로도 길고 긴 공부를 계속해나가면서 필요할 부분일 테다.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전생애에 걸친 그의 내면적인 투쟁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며, 그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하나의 길, 이러한 하나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 그리고 하나의 작은 길의 암시’인 것이다.”
어쩌면 이런 측면에서 헤세의 문학은 단순히 독일로 국한되지 않고 우주적인 세계관을 향하고 있다고 하겠다. 나 또한 전생애에 걸친 투쟁을 이어나가기로 다짐한다.
추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부모만큼 자녀를 망가뜨릴 수 있는 이도 없다. 이건 부모가 되면 더 생각해 볼 법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