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순교한 신부님을 기리며
Volkstrauertag, 우리의 현충일과 비슷한 개념이다. 시기는 항상 대림(Advent) 2주 전의 일요일. 대림이 크리스마스에 4주 앞선 일요일이니, 이 독일의 현충일은 크리스마스에 6주 앞선 일요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즉 쉽게 말해 11월 중순쯤이다. 원래는 독일이 프로이센 제국이던 시절,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날이었는데, 그게 현대에 이르러 모든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날로 발전했다.
개인적으론 독일에서 이 날을 맞이한 지 이번이 벌써 4번째지만, 이를 체감할 일은 거의 없었다. 지나가다가 듣거나 행사에 (보통 성당에서) 우연찮게 동참한 경우는 있지만, 독일인이 아닌지라 별로 감흥이 없었다고나 할까. (내가 굳이 독일의 순국선열들을 왜?)
이번엔 달랐다. 이는 6.25전쟁 당시 순교한 베네딕토 수도원인 보이론 (Beuron) 출신 선교사를 기리는 행사에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보이론은 프라이부르크에서 두 시간쯤 떨어졌는데, 천주교인이 아니고서야 남서부 출신 독일인들도 낯설어하는 지명이다. 아무튼, 이곳을 우리나라 신부님들과 함께 방문하게 됐다.
나는 사실 독일을 떠나기 전, 우리나라 왜관(대구 근교)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은 물론이고, 천주교 성지도 많이 가보았던지라, 이 왜관 수도원의 뿌리가 지금의 북한 땅인 덕원이었고, 그곳에서 생활하던 많은 천주교인이 북한 공산당에 의해 많은 박해를 받고, 순교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참 가슴 아픈 이야기다.
보이론 출신 신부님을 비롯한 순교한 분들을 이곳 보이론에서 매해,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추모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7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비극을 지금도 추모하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자리엔 순교한 신부님의 가족, 친지들이 함께했는데, 그들로선 돌아가신 신부님을 위해,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하는 게 뜻깊다고 느낄 테다.
추모식이 끝나고, 우리나라 왜관수도원의 본원인 상트오틸리엔(St. Ottilien)에서 온 신부님이 내가 우리나라 신부님과 우리말로 왜관이라고 하는 말을 듣곤, 내게 ‘왜관을 알아?’ 하며 말을 걸었다.
여러 번 갔었다고 말하니, 첫인사를 할 때만 해도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던 그가 갑자기 내게 엄청난 호감과 친근함을 표시했다. 왜관에서 누구를 아느냐부터, 내년 1월에도 한국을 갈 예정이고, 한국에선 이곳저곳을 다녀보았다 등등. 나도 상트오틸리엔을 가봤다고 이야기했다. 그 신부님은 너무 신이 났는데, 짧은 독일어로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자 나는 눈치를 보며 잠시 그 신부님에게서 벗어났다.
그러곤 생각했다. 보이론이 베네딕토 수도원인 건 알았지만, 그곳에서 내가 한 다리만 거치면 아는 분이 있을 줄이야. 인연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기에 그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건 어쩌면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격언인지도 모르겠다.
무거운 추모식 끝에 짧게나마 주어진 간식 및 다과는 아주 환상적이었다. 역시 수도원에서의 식사는 언제 먹어도 훌륭하다.
그리고 너무 어두워지기 돌아가기로 한다. 사실 이미 어두워지긴 했다.
수도원 자체가 독일 남서부인 슈바벤 지역의 또 다른 산맥인 ‘슈바벤의 알프스’(Schwäbische Alb) 한복판에 있고, 이 험난한 산골짜기의 조그만 길을 지나면 검은숲을 통과해야 하니, 4시 반이면 어둑어둑해지는 지금 날씨에, 도로에 가로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독일이니, 이를 통과하기란 아주 험난했다. 배도 부르겠다, 잠을 떨쳐보겠다고 신나게 음악을 듣고 가다가 불가항력적으로 과속 단속에 걸리기도 했다. 딱지가 날아오기 전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9할 이상 벌금이 날아오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곳을 또 오게 될 일이 있을까. 그래, 매년 독일의 현충일에 오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