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새 신부와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나의 부모님과 다시 재회했는데, 아버지는 한국으로 떠나고 어머니는 나와 그토록 염원했던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파리.
수많은 사람들이 명성에 비해 실망을 했다고 말하는 곳이지만, 파리만큼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곳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로마밖에 없다. 수백년간 문화의 수도로 자리잡았던 이곳엔 수많은 예술가가 노력했던 흔적는 물론이고, 그 역사가 진하게 배어 있다. 나 역시도 이젠 나름대로 꽤 많이 가보았다고 생각했거늘 또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고 놀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우린 먼저, 보편적인 관광명소들을 들렀다. 오르세, 오랑주리, 루브르 몽마르뜨, 노틀담 성당, 에펠탑, 개선문 등등.
그리고 시간이 조금 남아 매번 멀리서 보던, 그동안 수차례 파리를 방문하고서도 가보지 않았던 두 개의 돔 구조물을 직접 들어가보기로 했다. 먼저 팡테옹부터.
내가 진짜 파리를 잘 아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팡테옹은 정말 들어가서 볼 가치가 있는 장소였다. 들어가자마자 푸코의 진자가 관람객들을 반긴다. 푸코는,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해낸 실험 장치를 이곳 팡테옹에서 1851년 설치하였고, 그 모습이 지금도 간직되어 있다 (물론 모조품이다).
팡테옹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프랑스 혁명 당시 3신분의 대표이자 국민 의회의 수장이었던 미라보 백작으로 2년 후에 (라이벌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루이 16세와의 내통이 들통나는 바람에, 그의 유해는 철거되었다. 우리로 따지면 부관참시당한 셈.
이외에도 프랑스 혁명 관련된 인물은 물론이고, 로마에 있는 그것과 유사하게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을 다 모셔놓았다. 그 인물들의 내력이 화려하다. 볼테르, 루소, 빅토르 위고, 뒤마, 퀴리 부부 등등. 그들의 무덤을 따라가며 삶을 조명해 보는 게 아주 뜻깊었다.
일례로 마리 퀴리는 폴란드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남아 그곳에 묻혔는데, 그 시작은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이 여성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마리 퀴리가 폴란드에서 대학을 나왔다면 그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싶은 재밌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러고 보면, 폴란드의 자랑스런 음악가인 쇼팽도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숨을 거두지 않았나.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인재들을 잘 대우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보게끔 한다.
또, 아직도 몇몇 무덤에는 꽃으로 추모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국립묘지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항상 노른자위 위치에 무명용사의 비가 있는 것들을 보며 프랑스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예우가 대단하다는 점을 생각게 한다. 이외에도 파리의 성녀 제노베파 등을 볼 수 있었다.
팡테옹 바로 옆, 수많은 이들이 거쳐갔던 유서 깊은 소르본 대학이 있다. 한때 68혁명의 여파로, 평준화되어 파리 제4대학, 제6대학 등으로 불렸지만 마크롱 정부의 교육 정책으로 다시금 소르본이라는 옛이름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대학생이 많다 보니 센강 내지는 시테섬 주변의 관광지보다는 식당 가격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숙소도 이곳에 잡을 걸 싶은 생각을 이후에나 해본다.
그곳에서 조금만 걸으면 뤽상부르 공원에 이른다. 이곳에선 피렌체에만 잔뼈가 굵은 줄 알았던 메디치 가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리 드 메디치는 돈이 워낙 많았던 덕분에 빚에 허덕이던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와 결혼하고, 남편이 죽고 난 이후엔 섭정 노릇도 하였다. 권력욕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들에 의해 권력에서 끌어내려진 이후에도 수차례 반란을 일으키며 노욕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쫓겨나 쾰른에서 숨을 거뒀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다.
그녀는 본인이 후원하던 렘브란트에게 의탁하고 결국 독일에서 숨을 거뒀지만, 한때 권좌에 있었던 파리에 본인의 흔적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아름다운 공원과 궁전, 그리고 분수엔 메디치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파리를 수차례 와놓고도 이번에야 처음 가본다. 그땐 공원에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독일에 살다 보니 도시에 있는 공원에 특히 더 관심을 갖게 되는 듯하다.
이제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로 떠난다. 팡테옹보다 훨씬 더 화려한 이곳이 역설적으로 팡테옹보다는 영적인 기운이 없게만 느껴졌다. 나폴레옹의 화려한 관은, 키도 작은 양반이 저렇게 큰 관이 필요할게 무엇일까 싶은 생각까지 들게 한다.
수많은 군인들이 그곳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나는 특히 Vauban에 눈이 갔다. 내가 사는 프라이부르크 도시 내에 있는 친환경 마을의 이름이기도 한 그는, 루이 14세의 참모로 수많은 요새를 지은, 건축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이 프랑스와 독일 국경 주변 도시에 많이 남아 있다.
이것만 보고는 너무 입장료가 아깝다고 생각했거늘, 그 뒤에 있는 전쟁박물관이 아주 흥미로웠다. 루이 14세 때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대규모 전투가 구현되어 있는 전시는, 이제 이곳에서 삶으로 많은 지명이 익숙한 나에게 흥미로운 소재였다. 시간이 많이 허락하지 않아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
그렇게 누군가에겐 이미 다녀온 뻔한 관광지일 수도 있으나, 내겐 아주 색다른 방문이 되었다. 그동안은 그야말로 클래식이라 할 수 있는 오르세, 오랑주리, 루브르 등의 미술관과 에펠탑, 개선문 등만 둘러봤다면, 내가 알던 파리의 다른 모습은 파리가 왜 아직도 세계인이 제일 많이 방문하는 관광지이자 매력적인 곳인지 생각하게끔 했다.
한편, 그 클래식한 관광지 속에서도 예전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본다. 콩코드 광장부터 개선문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세종대로와 같은 샹젤리제의 거리엔 2차세계대전의 영웅들의 - 윈스턴 처칠, 루스벨트 - 흔적이 남아있다. 6주만에 독일에게 항복하고, 4년 넘게 치욕의 세월을 겪다가 본인들을 침략자로부터 구원해준 그들을 기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엇이 됐든, 엄청난 역사와 문화가 농축되어 있는 이 도시가 독일의 여타 도시와는 다르게 폭격당하지 않은 게, 어쩌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6주만에 항복하기를 잘한건가 싶은 생각도 들게끔 했다. 전쟁의 기한은 유한하지만, 그 문화는 그보다 훨씬 더 길고 영속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침략자인 러시아는 피해를 입지 않은 채, 그 문화는 계속 유지되는 점이 정말로 유감스럽다.
그리고 적어도 내겐 노틀담 성당이 그다지 인상깊진 않았는데, 이는 예전에도 그랬고, 복원된 지금의 모습도 그렇다. 너무나도 많은 관광객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몽마르뜨에 있는 사크레퀘르가 더 인상 깊었는데, 이미 수차례 가봤지만 그 건축배경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이는 1870년 보불전쟁 패배 이후,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목적이었다고 한다. 어떤 역사가가 그랬듯, 프랑스 혁명보다도 독일이라는 나라의 탄생이 유럽사에 있어서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는 걸 프랑스에서도 느낀다. 수많은 건축물, 그리고 팡테옹 내의 잔다르크를 그린 거대한 미술작품 등이 다 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를 부득부득 갈았으니, 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 프랑스는 독일에게 호의적일 수가 없었을 테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와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의 초석이 되었다. 그런 두 나라가 이제 손을 맞잡고 유럽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아이너리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고, 이런 모습은 전쟁과 갈등이 많은 이 시대에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작금의 각국 정치 상황은 과거로 후퇴하고 있는 건 유감이지만..
이외에도 파리에는 정말 다양한 식문화가 녹아져있다. 일례로 200개가 넘는 한식당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내가 방문한 곳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파리 속 한국이 예전보다 훨씬 더 크고 영향력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끔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어도 예전보단 치안이 좋다고 느껴졌는데, 이건 올림픽 전후로 바뀌게 된 것인지, 잘 알 수는 없다.
파리 방문을 마치고 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평화로운 검은숲의 수도로 돌아왔다. 수많은 감상과 지금보다 젊었을 때의 추억들을 생각하며, 그땐 동경하던 유럽 대륙에서의 삶을 이제는 꽤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이곳을 다시 방문하는 건 나의 주니어(들?)과 함께하는 그 날이지 않을까.
무엇이 됐든 한때는 동경했던 프랑스보다 이젠 훨씬 익숙해진 독일과 독일 맥주, 독일어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