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일기
로마에서 가깝긴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시골이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 군대에 안 가니 취직하고 대부분 도시로 떠나기 마련인데, 이곳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또, 중고교 졸업 이후에도 매일 같이 밤마다 만나서 만나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우리에겐 그런 여유가 없는 건 아닐까.
영어를 거의 못 쓰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이 영어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보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어 울렁증과 매우 유사하다. 분명 학교 때 배우긴 하는데, 그마저도 시험을 위해서만 할 정도이고, 그다음엔 쓸 일이 없다는 점. 그들에게 몇 가지 이태리어를 이야기하니 매우 좋아한다. 마치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말을 쓸 때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예를 들면, ‘오늘 저녁에 뭐해. 나랑 같이 놀래?’ 즉, 이태리 남성이 여성에게 작업 걸 때 쓰는 멘트다. 발음 교정까지 열심히 해준다. 그나저나 이곳에 오는 비행기를 탈 때, 이태리 남자는 옆 자리에 앉은 모르는 여성에게 바로 작업 걸더니 공항을 빠져나갈 땐 함께 떠났다. 이걸 보며, 내가 정말 이태리에 오긴 왔구나 싶었다.
관광객은 거의 없는 현지인만 있는 몇몇 도시를 간다. 한 번은 한 노인이 말을 걸더니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중간에 가고 싶은 눈치를 하고, 끝내 진짜 가야 한다고 하니, ‘1분만 더’라고 한다. 노인은 이 카페에서 본인이 젊을 때 핑크플로이드, 레드제플린 등의 음악을 접하고 드럼에 빠져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수십년 전 본인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그 자리에 있고, 그리고 그 자리가 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이것이 이태리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싶다. 매일 같이 변하고, 추억의 장소가 허물어지는 게 당연한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매력이다. 시간이 영원히 정지되어 있을 것만 같은 곳이다.
어젠 하루종일 로마에 처음 온 사람처럼 걸어다녔다. 베드로 성당, 나보나 광장, 트레비분수, 판테온, 게토, 포로로마노, 콜로세움까지. 이곳에 다시 오게 되어 좋으면서도 처음 봤을 때보다 감동이 덜 하다. 이는 그 전에 왔었고, 또 올 수도 있다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7년 전, 로마를 떠나는 날에 반나절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했을 땐,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 것 같이 아쉬워하며 떠났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른 신분으로 오니 마음가짐 또한 다르다. 이 때문에 더 감동을 못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한편 어떤 걸 보는 것보다 함께하는 사람이 더 중요한 시기가 왔구나 싶었다. 그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하니 새로운 걸 보러 가면 다를 거라고 한다. 그래서 나폴리부터 시라쿠사, 알베로벨로, 몬테카시노 등등 가자고 꼬셔봤는데 멀다고 못 간다면서 예전에 본인이 갔을 때 찍었던 동영상을 보여주며 이번에 우리는 안 갈 거라고 놀린다.
오늘 아침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하루 정도만 홀로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아말피 등을 돌아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쉽게 올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막상 못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여행자의 신분이 아쉬울 뿐이다. 웃긴 건 그들도 모두 여행자 신분이라는 사실. 이탈리아에 살면서도 이곳저곳 공간, 시간, 재정적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고, 로마 주변에 살면서도 로마는 여행자처럼 당일치기로 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라고 뭐 다르겠나. 그나마 대전에 살아서 전국 구석구석 놀러다니기 조금 용이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해군에 있었던 덕분에 전국 곳곳에 장기간 살고, 곳곳에 친구가 있는 게 좋은 일이다. 나는 어쩌면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라치오인을 알 뿐이고, 토스카나, 캄파냐 친구는 또 다를테다.
7년 전 사진과 어제 사진을 비교하니 많이 늙었다. 꽃다운 청춘이 가는지, 이미 가버렸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