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세시간. 밀라노다. 패션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이태리 제2의 도시이자 상업과 공업의 중심지. 이태리이지만 이태리보다도 독일에 가깝고, 어떤 한편 서울이 연상되는 곳이다.
처음에 친구를 봤을 때 귀티가 나고 차도 있고, 고등학교 때 미국도 갔다 왔길래 ‘너희 집 부자 맞지?’ 하면서 놀렸는데, 실제로 집에 와보니 부자 맞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외교계에 꽤 거물이시고, 정원, 호수, 상권, 학군이 모두 갖춰진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본인은 엄청 부자는 아니라고 하지만, 부족함 없이 잘 사는 건 맞다. 그런 한편, 현실적인 고민을 많이 하는 것이, 한국 사람의 정서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해군에서 돈 얼마나 모았냐고 묻길래 어느 정도 모았다고 하더니, ‘부자는 너였네. 독일에서 봤을 땐 네 나이 생각을 안 했는데, 갑자기 네 나이가 실감난다.’며 오히려 엿을 먹였다. 한번은 친구가 시내에서 목적지를 못 찾길래, 평생을 여기 살았는데 길을 못 찾냐고 면박을 주니, 그러는 너는 너희 동네 시내도 다 길 잘 찾냐고 물어, 당연하지 했더니, 그러고 보니 본인 할아버지도 길 잘 찾는다고, 나이 든 사람들이 현명해서 길을 잘 찾는다고 또 한방 먹인다. 재밌는 친구다.
밀라노는 지금은 이탈리아긴 하지만, 오스트리아 영향력 아래 있었던 기간이 굉장히 길다. 그래서 건축물에서, 산업에서, 사람들의 생김새에서, 도이치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곳이 이태리 경제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것도 그런 영향을 받아서 그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 시내 내부엔 중세 때 훌륭한 유적과 더불어 여러 박물관, 또 세련된 시가지가 있는데, 몇몇 건축물은 무솔리니가 만든 것이다. 파시즘은 나쁘지만, 무솔리니가 다 잘못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몇몇 친구가 했던 걸 생각해본다. 절대 옹호하는 건 아니다.
한번은 가까운 알프스 근처의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호반도시 코모에 가보자고 했더니, 거기 얼마 전 헤어졌던 여자친구가 사는 곳이라며 절대 안 간다고 하니, 그다음부터 이따금씩 코모 이야기를 하며 계속 놀려주었다. 그런 연유로, 하루는 밀라노 시내, 다음 날은 코모 대신 근처의 여러 도시 중에 괜찮아 보이는 베르가모에 가게 되었다. 본인은 머리털 나고 한번도 안 가본 곳이라며 도착하기 전까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베르가모. 알프스의 산자락이 보이는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적이 남아있다. 한 때, 베네치아가 유럽 내에서 제일 강력한 나라였다는 걸 새삼 느낀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하서 봐서 그런지 더욱 좋은 여행이었다. 나와 그는 모험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성공적인 모험이었다.
이 친구는 그동안 봤던 외국인 중에 제일 잘생긴 축에 속하는데, 부모님을 만나 뵈니 단박에 이해가 갔다. SNS에 돌아다니는 노숙자도 잘 생겼다는 이탈리아. 키도 큰 것이, 본인도 자기 잘생긴 줄은 안다. 동생도 TV에 가끔 나올만큼 미인이다. 잘 생기고 잘 사는 이들이 성격도 좋다는 걸 실감한다.
3박 4일 동안 신세를 많이 졌다. 얼마 뒤, 독일에서 다시 재회하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