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울을 읽고
지금으로부터 벌써 거의 넉 달 전. 혼자 서촌을 돌아다니다가 한 책방을 들어가 서점의 추천도서로 이 책을 처음 접했다. 세계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그 근원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는 항상 강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이었을지도. 그렇게 이 책을 덜컥 샀다. 그 이후로, 석 달 동안 거의 읽지 못했다. 멀리 갈 때마다 들고는 다녔지만, 무엇이 그렇게 바빴는지 책 한권 읽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감기가 걸리고 밀려 있는 여러 공부 거리에 싫증을 느끼고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서울의 탄생 시점. 누군가는 육백여년 전, 즉, 조선왕조 오백년, 또 누군가는 이천여 년 전 백제 위례를 그 근거로 꼽을지 모르겠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서울은 엄연히 다르다. 지금에야 다 서울의 행정구역에 들어가지만, 하나는 전자는 사대문 안의 서울이고, 하나는 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웅진 천도 전까지 백제의 근거지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 1500년 가까이 빈 땅으로 존재했다. 작가는 이곳에서 현대 서울의 원점을 찾는 건 넌센스라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서울은 600년 전에 갑자기 생겨난 도시일까. 고려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남경 행궁. 작가는 고려시대의 남경 행궁을 지금의 경복궁 안의 서북부 지역으로 추정한다. 이에 더 나아가 서울 도성 지역의 원점인 경복궁은 고려의 남궁터를 재활용한 것이자 지형을 재해석해 더 넓은 경역을 잡았다고 덧붙인다.
600년의 역사에서 300년 거슬러 올라간 서기 1100년 무렵의 경복궁 서쪽의 한 귀퉁이가 서울의 출발점이라, 흥미롭다. 이를 토대로, 작가는 직접 발로 뛰며 옛 흔적을 찾아 기록했다. 오랜 세월과 산업화의 영향으로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몇몇 길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길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다. 시간여행은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것이 사대문 안의 서울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인상을 주는 건 아닐까.
작가는 이어서 서촌에 국한하여 답사를 이어갔다. 설명하기를, 서촌은 워낙 역사적 층위가 다양하고 그곳에 깃들어 산 사람들의 양상도 다채롭다고.
서촌.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곳으로, 태종 이방원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이자 세종이 태어난 곳이자 광해군, 인조, 영조, 안평대군 등 많은 왕과 왕족의 역사가 깃든 곳이다.
시간이 지나며 사대부가 그 자리를 자리잡고, 이곳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이들도 시간에 따라 변화했는데, 그중 제일 큰 발자취를 남긴 건 장동 김씨. 충절과 의리로 요약된 사대부의 정신을 체현했다는 점에서 누구도 넘볼 수 있는 위상으로 빛나던 이들의 가문도 60년 이상 세도가문이 되어 선조들이 남긴 ‘청령한 기운’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준다. 이후, 이곳을 대표하는 이들의 세력도 바뀌다가, 끝끝내 구한말. 이완용, 그리고 친일로 둘째가면 서러울 윤덕영이 이 자리를 차지한다.
“조선 후기 맑은 문향의 원천이던 송석원이 100년에 걸쳐 왕실처족 세도정치의 전리품 비슷한 신세로 전락하더니 이제는 나라 도둑질의 부산물 처지로 곤두박질쳤다. 장소에 인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그곳을 가꾸는 사람이 바뀌면 장소의 격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서촌은 정치뿐 아니라 문화중심지의 역할, 수많은 예술가의 집이기도 했다. 김정희. 정선, 이상, 윤동주, 이중섭. 서촌이 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서촌이 그런 사람을 불러들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작가의 말을 곱씹어본다. 어쩌면 장소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장소를 만드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사람 중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인상 깊어 남겨본다.
먼저, 겸재 정선. 그의 그림에는 서촌의 옛 모습이 잘 담겨있는데, 인왕제색의 설명을 살펴보자.
“인왕산은 이 서촌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울타리이자 그 아래 서촌 사람들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영정조대 조선 문예의 르네상스기에 우리 산천을 우리 방식으로 그려내는 일의 한 정점에 이른 말년의 정선이 이 산을 소재로 불후의 명작을 남긴 데에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었음직하다. 이 그림은 임종을 목전에 둔 60년 지기의 쾌유를 빌며 칠순 노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것이 된다.”
미술학자 고 오주석은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궂은 날씨 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벗을 생각하며 정선은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이제 막 물안개가 피어올라 개어가는 인왕산처럼 이병연이 하루빨리 병석을 털고 일어날 것을 빌면서 작품을 완성했다. 그 안개에는 희망처럼 보일 듯 말 듯 한 푸른 먹빛이 배어 있다.”
“정선의 벗 이병연은 허무하게도 이 그림이 그려진 지 나흘 만에 죽었지만 정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던 간절한 원망은 인왕산 바위와 소나무와 폭포수와 물안개에 고스란히 담겨 새 시대를 향한 희망의 빛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다음은, 구한말에 전재산을 처분하고 솔가해 중국 동북지방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 6형제. 그들은 임진왜란 때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이항복의 직손이다. 이회영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이 서촌에 들어선 것도 우연은 아니다.
월남 이상재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ㆍ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백세청풍. 앞으로 100세대에 이르도록 맑은 기운의 본이 될 것. 장동 김씨 일가와 우당 선생은 가문도 다르고, 정파도 다르지만, 맑은 기운이 300년의 시대를 건너뛰어 이어졌다고 작가는 서술한다.
나는 이 모든 게 서촌을 갔을 때 내가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한때 이회영 선생의 책을 읽고 가슴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던 적이 있었다. 많은 독립운동 중에서도, 이는 그가 사관학교의 전신인 신흥무관학교 설립했기 때문이었을까. 여러모로 내 정체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서술한다.
“장소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사람이라는 매개 변수가 필요하며, 사람은 허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특정한 장소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양자 사이에는 특정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활하고, 일하며, 때로는 허우적거리는 장소를 우리가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관계를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장소와 사람, 사람과 장소의 관계에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대단히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시사점을 발견해 내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길어져 나오는 이야기는 서울의 어제와 오늘뿐 아니라 내일까지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짧은 한국 체류 기간 중 서울의 구석구석을 답사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골목골목 역사가 깃든 곳을 보며, 적지 않은 감동을 느꼈던 걸 기억해본다. 이런 이유가 다른 곳은 아니더라도, 사대문 안의 서울은 계속 가더라도 또 가보고 싶은 이유가 아닐까. 사진 찍기 좋은 곳, 어떤 카페, 맛집이 있다거나 소위 말하는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니는 요즘 시대의 여행에는 이 같은 답사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금 답사의 중요성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