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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의 현실

독일, 유럽, 뭐? 복지국가? 됐거든요.

by Sun

베를린에도 봄이 찾아왔고 나의 1년 육아휴직은 3월 초로 끝이 났다. 유난히 날씨 좋던 베를린의 봄날의 햇살, 우리에게는 그 햇살을 느낄 여유마저 없었다.


하루에 4시간 일하면서 레아가 어린이집에 "선생님과 혼자" 떨어져 있던 시간은 하루에 10분. 3월 말에야 1시간이 되었다.


어린이집을 오고 가는 데만 25분씩 총 50분. 적응기간이라고 어린이집에 같이 있어주면서 다른 아이들도 같이 봐주는 시간 1시간.


3월에 복직을 한 이틀은 괜찮았다.


그리고 언제나 일복이 터진 나에게 쏟아지는 업무들. 내 성격도 한 몫한다. 눈에 보이는 문제들을 그냥 두지를 못하니, 일터에서 하루에 4시간 일하는 애엄마가 총대를 메고 이것도 해결, 저것도 해결하겠다고 하니 일주일 만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물론... 새로운 매니저의 신임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꽤나 고지식한 독일아줌마인 데다가 마침 일은 또 열심히 잘하는 새로운 매니저. 같은 엄마라서 이해가 되는 면도 있지만 첫 달부터 너무 나를 몰아세우는 듯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독일인 특유의 수동적 공격성을 보였고, 결국 내가 직접 던졌다. 육아휴직 1년 만에 돌아온 사람한테 제대로 된 인수인계는커녕 이것저것 던져만 주고 다 중요하다고 하니 솔직히 너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가 우선순위를 짤테니 그것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 고.


그렇게 매니저랑 한판 하듯 대화를 하고 레아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집에 온 그날, 남편이 아프다며 데굴데굴 구르듯이 쓰러져있었고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에 갔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 날의 기억은 웬만하면 통째로 잊고 싶다






결국 매니저도 사람이고, 같은 처지를 겪었던 워킹맘이었던지라 나의 처지를 이해했고 우리는 어느새 같은 팀이 되었다.


내가 4월에 풀타임으로 돌아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 딸 레아의 어린이집은 그 자리 그대로 참 변함이 없었다. 4월 말 부활절 휴가로 2주 동안 문을 닫는다는 메시지를 처음으로 3월 시작 그 순간부터 매주 문을 닫았다.


하루는 선생님들이 아프다,

하루는 어떤 반에 이가 돌았다.....

하루는 선생님들이 한 명도 없다.

... 기타 등등.


그렇게 적응이 되는 듯 마는 듯하더니 1시간 30분을 드디어 채우게 된 딸. 남편도 조금 더 수월해지는 듯했고, 업무시간이 조금 더 유동적인 남편 덕에 드디어 나도 풀타임으로 마음 놓고 돌아가는구나, 그래 이렇게만 가면 되겠어! -라고 생각했다.


그다음 날, 레아는 이마의 시퍼런 피멍과 눈 옆의 큰 상처가 난 채로 돌아왔다. 이메일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이가 모래놀이를 하고 놀다가 기어 나오면서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다행히 모래사장이어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레아를 케어해 주는 선생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고, 그나마 제일 열심히 한다고 하는 선생인지라 나도 화만 낼 수는 없었다. -그래, 이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지,-라고 넘어갔지만... 그 순간 든 생각은 -내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회사일을 하나,-였다.


그다음 날, 일주일 뒤에 부활절 휴가에 들어가기로 했던 어린이집이 선생님들의 부재로 일찍 휴가에 들어갔다.... 일주일을 통째로.


풀타임으로 돌아가던 그 주 첫날, 레아는 집에서 울어재끼기 바빴고, 남편마저 장염인지 뭔지 아프다고 드러누웠다. 회사는 회사대로 난리.


그런데 참 이상하게 그날은 오히려 '누가 이 둘 좀 봐주고 내가 내 일 좀 똑바로 하고 싶네, '란 생각뿐이었다. 나의 일 년 간 마음 깊이 들끓던 모성애가 드디어 이성을 찾아가고 있었나.


아니, 이성은 없었던 것 같다. 아프다고 죽겠다는 남편한테 그럼 죽어-라고 이성 빠진 소리를 해댔으니.


아무튼 그날은 유난히 일 욕심이 더 났다. 기왕 인정받는 김에 더 잘하고 싶었다.





이제는 오만정 다 떨어진 베를린 아파트가 너무너무 싫었다. 징징대고 있는 부녀와 좁아터진 아파트에서 일까지 하면서 삼시세끼 요리까지.... 그야말로 숨이 막혀 내가 죽을 지경이었다. 리모트잡이고 뭐고 할 수만 있다면 오피스도 맨날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부활절 휴가가 찾아왔다. 한 사람당 편도 300유로 (한화 약 40만 원)하는 어이없는 가격의 라이언에어를 타고 마르세유 집에 왔으니 우리에게는 그만큼 이 휴가가 절실했다.


계획 없이 정말 쉬러 왔더니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바리바리 이것저것을 싸들고 우리 마르세유집에 찾아왔다. 덕분에 요리 안 하고 실컷 얻어먹고 와인도 마시고, 레아도 봐주니 숨 쉴 구멍이 좀 생겼다.


시누이는 틈만 나면 한 달에 한번 정도 친정엄마한테 아이를 맡기는 듯했다. 마르세유에서 친하게 지내는 커플도 역시나 친정엄마가 마르세유에 거의 살다시피 자주 왔다.


물론 "육아는 우리의 몫, '이라 굳게 믿으며 우리처럼 살아가는 친구들이 대다수인 이곳이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둘 다 풀타임을 뛰진 않고, 프랑스 어린이집은 독일처럼 매주 문을 닫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일주일이면 이미 적응해서 어린이집에 풀타임으로 다니고 있었다.


독일의 육아법, 교육법이 한국에서 한 때 아니면 지금도 유명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절대 레아를 독일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 졌다. 스트레스 안 받고 건강 챙기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아무튼, 부활절 휴가동안 햇빛 실컷 받고, 와인 원 없이 마시면서 당장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해 봤다. 어떻게든 지난 3월 4월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심산으로.


살아내지말고, 살자- 잘. 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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