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불행조차 경쟁해야 안심하는가?
불행은 본래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오늘날,
불행마저 등수를 매기고 앉아있다.
누군가는 이별로, 누군가는 가난으로, 또 다른 이는 존재의 불안을 이유로 자신의 상처를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누가 더 힘든가”를 가리는 대회처럼 변해버렸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대신, 자신의 아픔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로의 고통을 비교한다.
이것은 공감이 아니라 경쟁이다. 그리고 경쟁이 되는 순간, 공감은 권력이 된다.
‘공감의 시대’라는 말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시대의 공감은 묘하게 피곤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한다기보다, 위로받을 자격을 증명하려 애쓴다. SNS의 타임라인에는 슬픔의 크기를 드러내는 문장들이 넘쳐난다.
“나도 그런 적 있어.”
“그보다 더 힘든 일도 겪었지.”
이 말들은 위로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실은 상처의 크기를 재는 줄자에 가깝다.
누군가의 고통이 ‘더’ 크다는 사실이 타인의 감정을 덮어버리는 순간, 공감은 이미 기능을 잃는다. 공감은 연대의 언어였으나 지금은 증명의 도구로 전락했다. 누가 더 불행한가를 증명해야 비로소 사람들은 나를 봐준다. 그렇게 불행은 하나의 ‘서열’이 되었고, 동정은 일종의 사회적 통화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제 ‘아픈 척’은 사회적 생존 기술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한테나 티 안내고, 자신만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을 전시하며 감정의 시장에 상품처럼 내놓는다.
“이만큼 힘들어요.”, “그래서 저를 이해해줘야 해요.”
이 문장 뒤에는 묘한 거래의 냄새가 스며 있다.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해 우리는 고통을 가공한다. 있는 그대로의 상처가 아니라 팔리기 좋은 형태의 슬픔으로 다듬는다. 울부짖음은 문장이 되고 눈물은 선동과 콘텐츠가 된다. 그리고 ‘좋아요’의 개수가 슬픔의 진실을 결정한다.
이 얼마나 잔혹한 풍경인가? 공감은 더 이상 타인을 위한 감정이 아니다. 이제 공감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무대가 되었다. 공감받지 못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고, 공감받은 인간은 마치 윤리적 상위층으로 승격된다. 이 시대의 윤리는 따뜻하지 않다. 그저 ‘더 슬픈 자’가 옳다는 식의 잔혹한 질서만 남았다.
그러나 진짜 슬픔은 언제나 조용하다. 진심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고통의 무게는 비교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깊은 슬픔일수록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을 말로 증명해야만 이해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이 말은 틀리지 않지만, 모든 슬픔을 설명해야만 진심이 되는 사회는 너무나 잔인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보다 내가 더 힘들었어.”
“나는 이만큼 견뎠는데, 넌 왜 못 하니?”
이 문장에는 위로의 그림자가 없다. 그건 단지 고통을 계급화한 언어일 뿐이다.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는 대신 우리는 슬픔을 경쟁시키며 자신이 더 도덕적이라고 믿는다.
한때, 공감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공감은 피로와 냉소를 낳는다. 공감은 너무 쉽게 소비되고 너무 자주 오염된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 불안하다. 누가 진짜 아픈지, 누가 연기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무감각을 택한다. 공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점점 더 차갑고, 조용하게 썩어간다.
진정한 공감은 타인의 슬픔을 재단하지 않는 데 있다. 그가 어떤 이유로 고통받는지 따지지 않고 그의 감정을 ‘나보다 덜하다’ 혹은 ‘더하다’로 판단하지 않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공감조차 도덕적 경쟁의 도구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공감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도덕성으로 치환하는 기술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시대의 공감은 따뜻하지 않다. 그건 차갑게 계산된 연민이며 피로하게 반복되는 감정 노동의 의식이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보기보다 그 슬픔이 나의 윤리적 이미지를 얼마나 높여줄지 계산한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의 공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심으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이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한 위장인가?
공감은 나눔이 아니라, 투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투쟁의 끝에는 언제나 이 문장이 남는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오늘날, 불행마저 순위를 나누고 있다.”
공감의 위계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서로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신이 더 아프다는 사실로 존재를 증명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공감의 얼굴이며 이 시대가 가장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잔혹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