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병자들에게>
유행은 늘 스스로를 자연스러운 흐름인 척 포장한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마치 시간이 흐르듯,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유행은 자연이 아니다. 누군가 기획하고, 누군가 증폭시키고, 누군가 이익을 얻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인공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선택이 아니라 “당연함”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이미 사고는 멈춘다. 평균은 그렇게 탄생한다.
평균은 안전하다. 평균은 눈에 띄지 않는다. 평균은 비난받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균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율이 아니라 공포에서 나온다. 튀면 배제될까 봐, 다르면 설명해야 할까 봐, 이해받지 못할까 봐. 결국 유행을 따르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개인은 사라진다.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그냥 좋으니까.” 정말 그럴까. 정말 스스로 판단한 결과일까. 아니면 수백 번 반복 노출된 이미지와 문장, 분위기와 해시태그에 길들여진 결과일까.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설득된다. 특히 다수가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더더욱. 그 고개 끄덕임 속에서 사람들은 안도한다. 나도 틀리지 않았다고, 나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았다고. 그렇게 집단 최면은 완성된다.
유행은 사고를 단순화한다.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미 누군가 “좋다”고 판결을 내려두었기 때문이다. 이미 다수가 소비했고, 이미 검증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취향을 구축하기보다, 승인된 취향을 차용한다. 차용은 쉽다.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악을 듣고, 비슷한 카페에서 사진을 찍으면 된다. 개성은 그렇게 복제된다.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개성을 외치지만, 그 개성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더 우스운 것은, 유행을 따르는 행위가 종종 “자유”로 포장된다는 점이다. 선택의 시대라 말하면서,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플랫폼이 밀어주는 것, 광고가 반복하는 것, 인플루언서가 들고 나온 것. 그 좁은 범위 안에서 고르는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정해진 메뉴판 속 선택이다. 평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움직임일 뿐이다.
이 시대는 빠르다. 유행은 어제의 것을 촌스럽게 만들고, 오늘의 것을 필수로 만든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뒤처진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업데이트한다. 생각을 업데이트하는 게 아니라, 외형을 업데이트한다. 사유는 그대로 둔 채, 표면만 바꾼다. 유행은 그렇게 얄팍한 진보를 양산한다.
유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질문하지 않는다. 왜 이게 좋은지, 왜 이걸 소비해야 하는지, 왜 지금 이 분위기에 올라타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다 하니까”라는 이유면 충분하다. 다수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곧 근거가 된다. 다수의 선택은 진리가 아니다. 그저 다수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평균의 힘은 강하다. 평균은 개인의 의심을 무력화한다.
평균에 맞추는 삶은 편하다. 설명할 필요도, 부딪힐 필요도 없다. 그러나 편안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점점 자기 판단이 흐려지고, 자기 취향이 마모된다. 남들이 정해주는 기준에 익숙해질수록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힘은 약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무엇이 진짜로 좋은지조차 모르게 된다. 그저 많이 보이고, 많이 언급되는 것을 “좋은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시대는 늘 유행을 통해 사람을 관리해왔다. 정치적 이슈든, 소비 트렌드든, 라이프스타일이든. 방향을 제시하고, 속도를 조절하고, 군중을 한쪽으로 몰아간다. 군중은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깔린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 평균이라는 이름의 레일. 벗어나면 불편하다. 때로는 외롭다. 그래서 다시 올라탄다.
나는 평균이 싫다. 평균이 강요하는 침묵이 싫다. 다수의 표정과 다른 표정을 짓는 순간 받게 되는 미묘한 압박이 싫다. 유행은 다름을 세련되게 포장해 없애버린다. 모두가 조금씩 다른 척하지만, 결국은 같은 방향을 본다. 그 풍경은 기묘하다. 수많은 얼굴이 있지만, 하나의 얼굴처럼 보인다.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의 멍청함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용기의 문제다. 다수와 다른 선택을 할 용기,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용기, 남들이 열광할 때 조용히 고개를 젓는 용기. 그 용기가 없기에 평균 속에 숨는다. 그리고 평균을 옹호한다. “굳이 튈 필요가 있냐”고 말하면서, 사실은 튀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한다.
평균이라는 집단 최면은 달콤하다. 소속감을 준다.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자율성을 앗아간다.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빼앗고, 의심할 시간을 줄인다. 평균은 안전하지만, 안전한 만큼 무기력하다. 거기에는 날이 없다. 충돌도, 질문도, 불편함도 없다. 대신 무난함이 있다.
나는 무난함이 두렵다. 무난함은 사람을 천천히 무디게 만든다. 시대는 그렇게 무난한 사람들을 선호한다. 관리하기 쉽고, 예측 가능하고, 소비하기 좋다. 유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가장 적합한 인간형이다. 빠르게 반응하고, 빠르게 흡수하고, 빠르게 잊는다. 깊이 파지 않는다. 오래 붙들지 않는다. 그들은 가볍다. 그래서 쉽게 흔들린다.
평균을 거부하는 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그저 잠시 멈추는 것이다. 왜 좋아하는지 묻고, 왜 싫은지 인정하는 것. 다수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 그러나 그 단순한 태도가 이 시대에는 가장 어렵다. 모두가 속도를 자랑할 때, 멈춤은 용기가 된다.
유행은 사라진다. 오늘의 필수는 내일의 구식이 된다. 그러나 평균에 익숙해진 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태도는 계속해서 새로운 유행을 찾아 헤맨다. 비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채운 것이 없기에, 계속 외부에서 채우려 한다.
나는 그 공허를 직시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차라리 외롭더라도, 차라리 불편하더라도, 평균의 최면에서 벗어난 자각을 택하겠다. 유행을 경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평균이 안전하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시끄러워진다. 다수의 박수 대신, 몇몇의 침묵이 남는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평균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은 혼자가 된다. 그리고 그 혼자임을 견딜 수 있을 때, 유행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