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정작 ‘기억할 만한 하루’는 남기지 못한다.
카메라 롤에는 수백 장의 사진이 있지만,
그 어느 한 장에도
나의 감정은 박제되지 않는다.
감정은 빠르게 소비되고,
감상은 SNS 자막으로 대체되며,
기억은 서버의 용량에 맞춰 잊혀진다.
우리는 ‘기억될 만한 순간’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억은 있지만, 추억은 없다.
남아 있는 건 데이터뿐이다.
낭만은 무엇보다
‘존재를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문득 떠오르고,
익숙한 풍경이 갑자기 애틋해지고,
비 오는 날이면 괜히 책을 들춰보고 싶어지는 그 감각...
그 모든 것이 ‘기억 속에 자리한 감정’이 만들어낸
낭만의 작은 형상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기억조차 기능적으로 조각내고, 분류하고,
태그를 붙여 저장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감정이 깃든 기억이 아니라
업로드된 정보일 뿐이다.
‘기억되지 않는 순간’이란
존재했지만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수 없는 순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다.
우리 삶은 점점 더
‘기록은 있으나 기억은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런 삶은,
낭만을 잃는 것을 넘어
존재의 서정성을 포기하는 일이 된다.
낭만실조는 결국,
기억의 부재로부터 온다.
누군가의 체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저녁의 냄새,
그날 읽었던 책 한 문장,
말없이 앉아 있던 카페의 의자.
그 모든 것이 감각이 아니라
감정으로 저장될 때,
우리는 그것을 낭만이라 불렀다.
이제는
그 감각이 너무 빠르게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에 의미를 붙일 틈도 없다.
감상하기도 전에 해석이 붙고,
기억되기 전에 공유되고,
서정이 일기도 전에 평가받는다.
우리는 지금
삶을 감상하지 못한 채 소비하고,
감정을 시로 바꾸지 못한 채 넘긴다.
시는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방식이고,
낭만은 삶을 시처럼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그저 ‘분위기’가 아니라,
삶을 기억하는 능력이다.
기억되지 않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흐려지고,
희미해지고,
스스로조차
‘살아낸 존재’라는 실감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간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존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조차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낭만은 과거를 미화하는 능력이 아니다.
과거의 감정과 현재를 연결하는
서정적 통로이자,
자기 존재를 기억으로 관통시키는 길이다.
기억되지 못한 삶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을,
‘기억되고 싶은 나’를,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 오는 날,
혼자 걷는 길 위에서,
카페의 조용한 창가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며 먹는 늦은 저녁의 따뜻한 수프에서—
그 순간들을
‘기억될 만한 시(詩)’로 남겨야 한다.
그것이 낭만이고,
그것이 존재를 잊지 않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삶이 시처럼 기억되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낭만이 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나의 기억 속에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