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인기가 없고, 진실은 항상 불편하다.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글을 읽는다.
무언가를 느끼기보단, 무언가에 잠기길 원한다.
자신이 위로받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예쁜 말 몇 마디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스스로를 속인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썩어가는 자리에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감정적인 위로”에 만족하며
자기 인생의 무게를 다른 누군가의 글로부터
‘잠시 덜어내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무책임한 글쓰기의 시대다.
그런 글은 아름답고, 멋지고, 잘 팔린다.
그 글을 쓰는 사람은 수백, 수천의 좋아요를 받으며
영향력을 얻는다.
그 글이 당신의 현실을 바꿨는가?
당신의 무기력은 사라졌는가?
당신의 ‘고통의 본질’은 이해되었는가?
아니다.
당신은 그저 잠시, 생각을 멈추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또다시 다음 ‘예쁜 문장’을 찾는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현실 도피다.
이제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모든 글이 무겁고 철학적일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가벼움이 당연하다고 믿는 사회’에 있다.
깊은 통찰이나 불편한 진실에는
‘좋아요’ 대신 ‘지루해요’라는 낙인이 찍히고
진심과 진실은 비꼼과 오해 속에 사라진다.
사유는 외면당하고 소비 가능한 감정만이 살아남는다.
불편한 진실이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되는 세상,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다.
진리는 인기가 없다.
그래서 진짜를 말하는 사람들은 외롭고,
진실을 밝히는 글과 그런 비슷한 조언들 역시 외면당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자에게 생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불편하고,
불편은 피곤하고,
피곤함은 ‘손절의 이유’가 되니까.
사람들은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며
자신의 감정을 지적당하는 글에는 “꼰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회피하며 사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남의 말에 감정적으로만 반응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진실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진실은 피드백이 아니라
반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글,
그 무게를 견딜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
진실은 불편한 ‘불청객’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보다는 달콤한 거짓을 원한다.
나는 그런 세태를 탓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할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읽고, 무엇에 반응하는지를 매번 점검하라.
그것이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감성적이라는 이유로,
공감된다는 이유로,
그 글이 진짜라고 착각하지 마라.
지금 당신을 흔드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포장된 공감일 수 있다.
당신을 마취시키는 글일 수도 있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조차 구별하지 못한 채
감정에만 매달리는 순간,
당신은 ‘자기 기만’이라는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대중적인 글을 좋아한다고?
그건 늘 그래왔다.
진리는 언제나 소수의 몫이었고
진실은 대중에게 환영받은 적이 없다.
정말로 깨달음을 주는 말은 예쁜 문장이 아니라,
“당신이 지금껏 외면해온 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세상을 바꾸는 건 위로가 아니다.
진실을 견딜 수 있는 자만이 변화의 주인이 된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 애초에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그걸 판단하는 기준은 단 하나.
세상이 예쁜 말로 포장될수록,
누군가는 추한 진실을 들고 나와야 한다.
그 역할을 맡는 자는 인기가 없고,
따뜻함도 없고 또한 고립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가 만든 파문이
가장 멀리까지 퍼진다.
그러니,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의 진심이 외면당하고 있다면,
그건 오히려 옳은 방향에 서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진심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세상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