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게 많아도 책은 괜찮대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설 무렵부터
책에 대한 욕심이 유달리 많았다.
아이들에게 책이란 대체로 만화책이나
그림책의 형태였지만 내게는 조금 달랐다.
그 시절 교실에 만화책이 등장하면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어떤 아이는 앞 장면을 빨리 넘기라며 손뼉을 치고
다른 아이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며 책장을 붙들었다.
그 소란 속에서 나는 늘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내 손에는 그림 한 장 없는
빽빽한 활자로만 가득 찬 양장본이 들려 있었다.
독서 시간이 되면 나는 주저 없이 그것을 펼쳤고
친구들이 만화 속 주인공을 두고 왁자지껄할 때
나는 고요한 활자의 숲에서 길을 잃는 것을 택했다.
그때는 용돈이라 해봐야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돈을 모아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미 새로운 세계를 산 것과 다름없었다.
책을 고르고, 손에 쥐고,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순간이
나의 기쁨이었다.
읽을 수 있든 없든, 끝까지 다 보든 못 보든,
중요한 것은 내 손에 책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집중력이 부족해 지금처럼 깊게 몰입해 읽지는 못했지만
책에 대한 욕심은 넘쳐 흘렀다.
그래서 다 읽지 않을 책까지도 기어코 사서
책장에 꽂아두곤 했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나를 위로하고
나를 다른 아이들과 구분 짓는 근거가 되었다.
누군가의 강요로 시작된 습관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 선택한 그리고 빠져든 집착 같은 애정이었다.
지금 말하는 것은 내가 남들과 달리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 시절 쌓여 가던 책들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보다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이 더 컸다.
책장은 나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고
책은 나를 드러내는 얼굴이었다.
고등학생이 될 무렵 때는
책을 가지면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얻었다.
그것은 아직 어린 나에게 가장 값진 보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독서의 양이 쌓여가면서 나는 이상한 모순에 부딪혔다.
독서는 나에게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었고 세상을 꿰뚫어 알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책을 통해 느끼고 싶었고
책을 통해 위안을 얻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8살부터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책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세상을 다 아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여전히 무지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식을 무너뜨리고
내가 믿었던 확신을 흔들었다.
어떤 책은 내 생각을 확장시켰지만
동시에 내가 얼마나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지를 드러냈다.
또 어떤 책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지만
그 깨달음조차 잠시 머물다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면 알수록,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지의 자각이야말로
독서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독서를 통해 지혜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경험은 달랐다.
독서를 통해 얻은 것은 지혜의 충만이 아니라 지혜의 부재, 즉 무지의 자각이었다.
그리고 그 모름을 인정하는 순간에만 비로소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늘 책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 때문도
세상을 더 잘 알고 싶다는 목표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책을 곁에 두어야만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은 내게 보호막이자 동시에 거울이었다.
책장을 메우는 행위가 내 삶을 채우는 행위와 다르지 않았고 책을 소유하는 행위가 곧 나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책이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책이 내 무지를 가려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책은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얼마나 모르는지를 더 선명히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책에서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책이 던지는 질문을 붙든다.
그 질문 속에서 흔들리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야말로 독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6년 동안의 독서는 나를 채워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비워냈다. 내가 가진 확신을 지워내고
내가 붙들던 정의를 흔들어냈다.
하지만 그 비움 속에서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모른다는 사실을 직면했을 때 나는 오히려 더 자유로워졌다.
무지를 인정하는 자만이 새로운 지식에 다가갈 수 있고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진정으로 배울 수 있다.
어린 시절, 그림 없는 양장본을 펼치며
친구들과 다른 세계에 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했던 나.
용돈을 모아 서점에 가던 길을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 여겼던 나.
그리고 지금 책을 쌓고 읽으며
오히려 무지를 자각하게 된 나.
결국 모든 과정은 이어져 있다.
책은 늘 곁에 있었고 나는 그 곁에서 조금씩 성장했지만
동시에 조금씩 무너졌다.
그 무너짐이야말로 내가 책으로부터
얻은 가장 솔직한 가르침이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지가 나를 살린다.
책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고
나는 그 질문 속에서만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