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관계의 가지치기와 600년의 나무

가지를 치며 비로소 보이는 사람들

by 정써니
관계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것이다.

며칠 전 라디오 캠페인에서 흘러나온 문장이

귀에 걸렸다.

중년에는 '새로운 관계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돌볼 때다' 라는 말.


같은 얼굴들 사이에서

요즘 만나는 사람들이

늘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문득 마음이 멈춘다.

내 인맥이 너무 좁아진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조용한 한 문장.

‘관계의 가지치기'

그 말이 내 마음 한쪽을 가볍게 울렸다.


누군가 말했다.

중년에는 ‘관계의 가지치기’가 필요하다고.

새로운 얼굴을 끝없이 붙잡기보다

이미 내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천천히, 더 깊게 마음을 내어줄 때라고.


살아갈 날이 유한함을 실감하는 나이.

이제는 감정을 소모하기보다

감정을 잘 다루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관계도 그렇다.

많음이 아니라, 오래 버티는 한 사람.

넓음보다, 천천히 쌓이는 나이테 같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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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을 품은 한 그루 나무

얼마 전 황석영 소설가는

83세에 장편소설 〈할매〉 를 펴냈다.

600년 동안 한 마을을 지켜본

팽나무의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


그 나무가 품은 시간 속에는

전쟁도, 사랑도, 죽음도,

끊어지고 이어진 수많은 인연들이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


놀라운 건, 그는 말한다.

“미수(88세)까지는 글을 써야 한다”고.

평생의 시간이 저토록 많은데도

여전히 쓰고, 관계 맺고, 기억하려 한다.

그 꾸준함이 경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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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남는 사람의 힘

〈할매〉 속 팽나무는

오고 가는 사람들,

떠나고 돌아오는 인연들,

때로는 단절되고 때로는 다시 이어지는

관계의 흐름을 묵묵히 받아낸다.


그 오래된 나무는 말하지 않지만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끝까지 남는 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래 머문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관계는

시간이 아니라

정성이 만든다는 것.


나는 다시 생각해본다.

내 곁에서 계절을 함께 지나는 사람들,

가지를 치듯 비워낸 자리에도

끝내 흔들리지 않고 남는 얼굴들.

그 몇몇의 관계가

어쩌면 나에게는

600년 된 팽나무처럼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만나는 사람은 같지만

그 사실이 더 이상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이테는 넓지 않지만

단단하게 쌓이고 있으니까.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