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의 기억, 이야기로 먼저 세상을 믿던 아이
어릴 적,
독서에 처음 재미를 느끼게 한 책은
소공녀였다.
국민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막내딸인 나에게
아무 말 없이 책 한 권을 건네주셨다.
설명도, 당부도 없이
무심하게..
언니들이 많았던 덕에
한글은 입학 전에 비교적 일찍 뗐고
구구단도
외우기보다는
1의 배수, 2의 배수, 3의 배수처럼
나열해 적어가며 익혔다.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잘했다는 칭찬도,
기대라는 단어도 없이
다만
알아보고 있다는 태도로
조용히 지켜보는 쪽에 가까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내게 소공녀를 건넨 건
그저 어린 딸에게 책을 쥐여준 일이 아니라
‘이 정도는 읽어낼 수 있을 거라’는
말 없는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예전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표현방식,
조금은 서툰 사랑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츤데레 사랑.
어린 손에 쥔 소공녀는
꽤 두꺼운 책이었다.
처음에는
한 장 한 장 더디게 읽어 내려갔는데
이상하게도
읽을수록 속도는 더 느려졌다.
몰입이 깊어질수록
문장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공주로 살던 세라는
어느새 내가 되었고
기숙사 다락방에서의 시간은
곧 나의 감정이 되어
같이 울고 웃고 꿈꿨다.
책의 두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서히 자리를 옮겨갔고
나는 세라의 생활에 함께 젖어
꿈같은 시간을 건넜다.
그렇게 만난 첫 독서는
꽤 깊은 자국을 남겼다.
지금 돌아보면
국민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던 그 꼬마는
이미
말보다 이야기를 먼저 믿는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를 사랑하게 된
지금의 나는
여전히 책 곁에 머문다.
읽는 속도는 느려졌고
문장은
쉽게 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는
문장 하나에 오래 머물며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가늠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마도
그날,
아무 말 없이 건네받은
소공녀 한 권이
지금의 나를 데려온
첫 문장이었고
나를 믿고 건네준
첫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기억하며
어릴 적 첫 독서를
조심스레 꺼내 보는
아련한 감정은
소리 없는 부름이 되어
마음 깊은 곳으로 이어진다.
아버지,
참 많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