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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Aug 14. 2024

Largo와 Lento

빌헬름 함메르쇠이 <피아노 치는 여자가 있는 실내, 스트란드가 30번지>

여름분기 마지막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오늘 하필 무슨 국제 음악캠프가 열려서 연습실 렛슨실이 다 가득 찼다.

아싸 ~잘하면 레슨 쨀 수도 있겠다. 내심 기대가 된다. 

엄청 난감해할 선생님을 끌고 교내 찻집에 가서 이야기하고 놀자 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는데 124호로 오라는 간결한 메시지가 딸랑 들어온다.

그렇지 ᆢ그럴 리가 없지ᆢ

독일에서 오래 공부한 선생님이라 그런지 원리원칙 파다.

북작거리는 캠프 속에서 기어이 렛슨실을 하나 비워냈다.

나이 든 학생의 능그러움으로 퉁쳐보려 했으나 딸뻘의 샘한테 여지없이 잡혔다.

괜히 징징거려 본다. 넘 어렵고 힘들어서 리스트한테 정이 다 떨어졌다. 너무 택도 없이 어려우니 피아노에 대해서도 정이 떨어질 뻔했다 운운.

어머 어머 놀라는 척 다 받아주면서도 레슨은 얄짤없다.

단지 계속해서 잘했다고 격려성 칭찬만 고봉으로 담아준다.

 아마추어 콩쿨용으로 주신 곡 같은데 나는 콩쿨보다는 그냥 연습실에서 혼자 유유자적 연습하는 걸로 족하다.

음을 짚어내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이다.

이런 아마추어에게 리스트는 너무 사악해서 분노를 유발한다. 내가 하도 학을 떼니 샘도 오늘로 곡을 끝내주시고 드디어 다른 곡을 주신다. 3일에 한 번쯤은 꼭 리스트를 한 번씩 쳐야 한다면서.

대답은 낼름 네 했지만 누가 지나간 것을 다시 보겠는가.

거의 반년을 쳤다. 해도 해도 되지 않으니 화병만 키울 뻔했다. 사악한 리스트.

자기 손가락 긴 것과 잘 돌아가는 것 과시하고 싶어서 이따구로 곡을 썼나 싶다.


문득 서른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친구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중1 영어 교과서로 공부하는 날 의아한 눈빛으로 보는 친구에게 내 30년 후 꿈이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다가 눈이 피곤하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한 곡 치는 것이라고 했던 그날이 또렷이 생각난다.

그 어둑했던 교실과 창밖의 푸른 나무까지.


지난 주말 목사님은 90세 넘게 살았다는 어느 유명 목사께서 인생이 너무 짧다 하시더라며 설교를 이어가셨다.

난 그렇게나 오래 사신 분이 인생이 짧다 하면 좀 믿기지가 않는다.

난 늘 인생이 길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휙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충분히 천천히 간다. 많은 걸 느끼고 담고 채우고 갈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간다.


나는 20대쯤 시간을 제일 지겨워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시간이 지나가는 초침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60이 가까워오는 지금, 시간은 내 속도로 간다.

내가 안단테로 연주하면 안단테로 가고, 알레그로 하면 알레그로로 흐른다.

몽골 여행 다녀와서는 라르고이다.

라르고 기념으로 마침 혼자 지내게 된 일주일간 더욱 심하게 라르고다. 라르고보다 더 느린 빠르기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렌토였나 ᆢ

레슨 마치고 커피숍에 들어온 지금은 확실히 Lento다.

아마 렌토여서 이리 글을 끄적이는지 모르겠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이 오래되면서 생각해 보니 내 삶의 속도가 빠를 때 글을 쓸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피아노를 매일 연습하지 않는다면 좀 느려지려나.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삶이 좀 느려지려나.

매일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더 여유로울려나.


어떨 땐 그저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이 책 저책 뒤적거리고 있고만 싶다. 그럴 때 나는 제일 행복할 것 같다.

이 미친 듯 타들어가는 여름을 창밖에 가두어 놓고 그러고 있고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ᆢ

우리는 짧지 않은 인생을 받았지만 짧아지게 만든다.

우리가 적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낭비한다-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오늘 아침 읽은 이 구절에 깊게 공감한다.

우리가 낭비만 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충분히 길다.

모든 순간 충만히 살 수만 있다면 ᆢ


나는 지금 충분하다.

땀을 흘리며 피아노를 치던 오전과

어쩔 수 없이 레슨에 끌려들어 갔던 정오와

글을 쓰고 있는 이 찻집의 오후까지ᆢ


빌헤름 함메르쇠이 <스트란드가드 아파트 실내, 바닥에 가득한 햇빛>  이 화가의 그림이 이상하게 시원하게 해주고 나를 lento로 내려주는거 같다

햇빛, 빛 속에서 춤추는 먼지, 스트란드가 30번지



저 고요하고 푸르른 실내에서는 시간이 아다지오로 연주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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