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금각사를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기억의 저편에 사라졌다가 교토를 가게 되어 그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아주 옛날 책이라 다시 읽히려나 했는데 생각보다 잘 읽히고 빨려 들어갔다. 책 내용은 기억나는 바가 전혀 없었다.
위험하게 날이 선 아름다움이 베일 듯 책장 가득 날아다닌다.
중간 정도 읽었는데, 금각사를 갈 날이 되어버렸다. 책을 다 읽고 가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었다.
정말 금각사가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며 찾아갔다. 오랜 상상 속에 있던 존재를 실제로 보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상상과 실재가 만나는 지점은 언제나 참담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부적 같은 입장권을 손에 들고 밧줄이 쳐진 대로 루트를 따라가니 금방 금각이 나타나버린다.
이렇게 쉽게 허무하게 나타나다니…이런 한낱 물질계에 있는 존재라니.
눈 오는 날, 어두운 밤, 비 오는 날, 뭔지 모를 갈증으로 주인공이 달려 나아가던 그 금각이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나무 사이로 나와버린 것이다.
미시마 유끼오가 본 금각은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 고즈넉했다는 금각이리라.
단정하게 꽉 채운듯한 금칠한 누각이 연못에 또 다른 자아를 품듯 드러내며 서 있다.
책에 묘사되어 있던 그 쓸쓸하던, 처연하기도 하던, 또 절대적 미를 상징하던 바람 불던 금각사는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연못가에 특이하게 금칠을 휘두른 정자가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현실을 가로막던 그 신비한 아름다움은 저 물속에 어리는 금각의 흔들림처럼 환영 속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미시마 유끼오가 묘사하던 금각사는 어쨌든 저 금각사는 아니다. 불에 타기 전의 금각사다.
금각사 방화사건과 불을 지른 어린 승려의 진술 중 <미에 대한 질투>라는 표현이 작가의 관심을 끌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
소설 중 금각사는 사람이 살아가는 육화 된 물질계를 초라하고 속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세상의 따끈따끈하고 생생한 육체를 만지려 할 때마다 저 금각이 나타나 현실과 맞닿으려던 주인공의 손을 떨구게 만든다. 지독한 모멸감을 안기면서.
- 금각만큼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생을 모욕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미는 없었다. -
- 그것은 나와, 내가 지향하는 인생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 한 손으로 영원을 만지며, 다른 한 손으로 인생을 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
금각을 불태우는 장면이 그의 머리를 휘어잡기 시작한다.
어쩌면 주인공은 영원보다는 세상을 만지고 살기 위해 금각을 불태우기로 결심했는지 모른다.
세상에 속하기 어려운 기질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한 주인공의 세상과 합류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까.
불을 지르고 미친 듯 산으로 도망친 후 자살하려 했던 계획과 달리 그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살아야겠다’였다.
싱겁게 끝나버린 금각사와의 만남.
인간의 상상이란 얼마나 찬란한 것인가.
인간이란 얼마나 알 수 없는 존재인가.
탐미주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던 미시마는 몸을 벌크 업하고 육적인 세계에 몰두하는듯한 시간을 지나 극우주의자가 되어 할복자살에 이른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거란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는 모양이다.
뒷날 은테 하나 두르지 않은 은각사를 가서 동네 길을 걸었다. 철학자의 길이라 불리던 그 조용한 마을길이 좋았다.
추운 겨울의 오전, 그 조용한 마을이 너무 좋아서 나는 은각사가 더 좋았다. 왜 은각사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