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바르는 약
엄마가 죽었고 그것에 대해 글을 썼다. 써놓은 글은 사실 한동안 서랍 속에 들어있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인 데다 신성한 성역과도 같은 엄마를 추모하는 글과는 다소 거리가 있게 쓴 글이었다. 소설이 아닌 이상 엄마나 가족에 대한 부정적 사실들을 주제로 쓴 글을 나는 브런치에서 읽은 적이 없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이 글을 올리면 반응이 싸늘해질 것을 미리 예감한 까닭이었다.
처음부터 내 어린 시절과 엄마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브런치였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익명을 통해 솔직하게 말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브런치는 내게 일종의 '무대'이자 나만의 '대나무 숲'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글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글솜씨가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엄마였고, 되돌릴 수 없는 어린 시절 상처만 들 쑤시는 결과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내 딴에는 수위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익명이라 해도 수치심을 동반하며 느끼는 죄책감과 함께 글을 읽는 사람들 반응이 신경 쓰이기도 했으니까.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어긋나는 글 방향에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선을 넘는 상당한 용기가 내겐 없기도 했다.
나는 글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심한 학대와 방임 속에서 자랐다. 엄마는 딸을 미워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진 주양육자였고 나는 저항하지 못하는 힘없는 어린아이였다. 엄마의 나쁜 영향력은 어린 시절뿐만이 아니었다. 결혼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아침부터 전화로 하는 돈부탁이나, 찾아와서 구구절절 신세한탄하는 말로 내 마음을 휘저어 놓으면 며칠 동안 정작 내가 간수해야 할 식구들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경제적인 문제로 괴롭게 했다. 나도 녹록지 않은 형편에 남편이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도와주어야 했다. 그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끝이 없었고, 남편 앞에서 나는 팔려 온 사람처럼 주눅 들어 있었다. 내 마음에는 상처에 대한 굳은살이 이미 박였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엄마가 하는 혹독한 행동과 강력한 저주의 말들은 늘 새로운 상처를 마음에 남겼다.
더 많이 불행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야!' 수없이 달래고 달래며 위안을 받으려 노력도 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그릇의 크기는 다 다른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딛고 일어서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런 부모를 사랑과 관용으로 대하기도 한다. 내 몫의 그릇은 간장종지처럼 작은 것이었는지 조금만 담아도 늘 차고 넘쳤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어려웠고 힘에 부쳤다.
아마 지금 이글에도 '그래 너 잘났다'라든가 '끝까지 뭐라는 거야?'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 있다. 잘못을 해 놓고 덮어보려 끝까지 변명이나 핑계만 늘어놓는 비겁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현재가 행복하면 불행한 과거를 떠 올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객관적 사실로만 본다면 인생 모든 순간들 중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자유와, 물리적인 안락함과, 신체의 건강함을 누리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왜 나는 그때로 돌아간 듯 불안하고 무기력하고 고통스러운 걸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늪에라도 빠진 것처럼 왜 자꾸 엄마와의 기억을 놓지 못하는 걸까?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하는 쓸데없는 후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결국 나는 인정이나 공감이나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어릴 적 동네 순옥이 엄마가 해주던 것처럼 내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거려 주면서 이런 말 한마디 해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던 것처럼 진심을 담은 이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그렇게 오랫동안 나는 징징거리며 끊임없이 투정을 부려 온 것은 아닐까? 내 오랜 상처에 바르는 약은 나잇값도 못한다는 비아냥이 아니라 공감해 주는 한마디 말이 아닐까? 엄마에게 받지 못한 칭찬과 위로의 말은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 서랍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하는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기도 하고, 내게 글을 쓰는 에너지를 주던 대상이 사라졌으니까.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이 가을과 함께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또 오면 나는 예전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옛 기억 따위 다 떨쳐버리고 현실적인 인생의 흐름에서 한 발짝 떨어져 느긋하게 관조(觀照)하며 늙어가는 성숙한 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