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생각
입원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내 옆자리는 어제 퇴원을 하고 새 환자가 들어왔다. 퇴원은 주로 오전에 하고 침상을 소독하고 깨끗한 시트와 이불을 꺼내 정리를 마치면 새로운 환자는 오후에 들어왔다. 사람마다 제 각각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음을 병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새롭게 깨닫는다.
어제 퇴원한 옆자리의 젊은 여자는 습관처럼 자주 코를 풀었다. 그녀가 코를 풀 때마다 아무것도 없는 콧속 빈 공간을 돌아 나오는 소리만 커다랗게 들렸었다. 나이 먹은 특유의 오지랖으로 저렇게 하는 것이 코에 안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새로 들어온 환자도 젊은 여자였는데 낮에도 거의 커튼을 활짝 걷는 일을 없었으므로 무엇을 하는지 알 수없다. 하지만 나는 바로 웃음이 지어졌다.
" 아유, 이게 왜 이리 안 열리지? 흥 이제야 겨우 열었네. 주스 한 병 마시기가 이렇게도 어려워서야.. 맛은 있군!"
"어머! 또 떨어뜨렸네. 아이고~ 허리야! 이건 또 왜 하필 구석으로 떨어져서 안 집히는 거야! 도대체.."
그녀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혼잣말로 중계를 했다. 가려진 커튼너머로 그녀 행동이 눈에 보이는 듯 그려졌다.
병원생활은 무료하다. 나는 형식적으로 보이는 링거줄을 하나 꽂고 있었을 뿐 먹는 약도 없어서 대체로 자유로웠다. 맞은편의 할머니와 그 옆자리도 퇴원을 했고 침상정리 후 바로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백화점에 가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백화점에 자주 오는구나 싶고, 모처럼 장거리를 가게 되면 차들은 모두 고속도로와 휴게소에 와 있는 것 같은 것처럼 느껴지듯이, 병원에 와 보니 주변에 온통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싶다.
새로 주문해서 가져간 몇 권의 책은 침대를 벗어나지 않은 덕에 빠르게 읽어 치우고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링거 거치대를 끌고 수세미 같은 머리를 한 채로 병원을 한 바퀴 돌다가 '휴게실'을 발견했다.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었고 작은 카페처럼 꾸며놓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TV를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확률적으로 환자의 연령대가 높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마치 내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전혀 무리 없이 그곳 분위기와 자연스러웠다. TV는 저녁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은 다 비슷했다. 자연스럽게 링거거치대를 하나씩 끌고 어딘가 불편한 모습으로 가볍고 편한 신발을 신고 힘없이 앉아있었다. 드라마에 집중하지 못한 채 나처럼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나는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운가? 내게 묻고 싶었다. 나는 서둘러 병실로 왔다.
2008년인가 개봉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가 있다. 잘 생긴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 각각 남녀 주인공으로 나온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이라는 제목이 원작이다. 이 영화는 죽음을 눈앞에 둔 할머니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따로 줄거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싶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말의 뉴올리언스가 배경이다. 노인의 외모를 가진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그런 생김새 때문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양로원 앞에 버려지고 그곳에서 일하는 흑인 여자 퀴니가 맡아 기르면서 노인들과 함께 지낸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인생들을 접하며 살아가는 중에 양로원에 있는 할머니를 만나러 온 소녀 데이지를 만난 후 그녀를 잊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벤자민은 젊어지면서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거꾸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지나 둘의 나이는 비슷하게 교차하게 되고 결국 데이지와 사랑을 이루고 딸 캐롤라인도 태어나지만, 함께할 수 있는 시기는 짧기만 하다. 벤자민의 시간은 계속 거꾸로 흘러 마침내 그는 치매에 걸린 어린아이가 되고, 갓난아기 모습으로 사랑하는 데이지의 품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니까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다 갓난아기가 되는 인생을 거꾸로 사는 남자가, 할머니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여자의 품에서 아기로 생을 마감하는 사랑과 삶을 포함한 한 남자 일생의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인 것이다.
시술을 하고 꼼짝 못 하고 침대에 누워있던 시간에 이불밖으로 보이는 내 발을 보면서 내 몸이 쓸모없이 정말 크고 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얗게 되어 가는 머리카락, 힘없는 피부, 점점 더 늙어가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이 영화가 생각났다.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정말 어떨까? 요즘 '틀딱'이나 '꼰대'라는 천박한 표현으로 노인을 혐오하는 시대에 어쩌면 훌륭한 대안이지는 않을까 하는 정말 영화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神)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내가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영화감독이나 원작자가 시사하고자 하는, 또는 시사하고자 했을 '삶과 죽음의 대칭성'이나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인간의 이기심',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삶의 한계와 수용'등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다.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로 삶을 마감한다는 참신한 발상이 마음에 들었었다. 사실, 늙은 노인과 어린 아기는 많이 비슷하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것, 많은 시간을 누워 지내는 것, 스스로 먹을 것과 대소변을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주체하지 못하는 커다란 몸이 때로 자신과 주변을 힘들게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벤자민 버튼처럼 거꾸로 늙어간다면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기 벤자민이 데이지의 품에서 삶을 마감하는 장면은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그것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아 이런 생각을 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아기가 되어 장년(壯年)이 된 자식의 품 안에서 아름다운 마지막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에.
그렇게 상상과 공상 사이 어디쯤을 헤매다 퇴원날이 되었다. 평소의 어지럼증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일주일 만에 퇴원하는 날에는 병원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여기저기에서 보내온 기프트쿠폰으로 달콤한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커피도 챙겼다. 이렇게 태어나서 처음 해 본 '입원생활'을 마무리한다. 집에 오는 날도 겨울 햇살이 등에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