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셋맘 May 25. 2022

변기 잘 뚫어주는 남자

Part1.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다

 남편은 내 대학교 동기 오빠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사실을 알게 된 오빠는 자신의 후배를 소개해준다고 제안했다. 이상형을 묻는 오빠에게 나는 한 가지 부탁만 했다.

“연하만 아니면 괜찮아요.”

다음 날 오빠는 내게 연하남을 소개해줬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남편을 처음 만나게 된 날, 나는 갓 대학생이 된 새내기를 능숙하게 리더하는 복학생이 된 듯했는데 내가 예상한 대로 분위기가 흘러가자 나는 연하남이 더더욱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당시 내 이상형은 나를 리더해줄 수 있는 박력 있는 연상의 남자. 그것도 나이 차가 꽤 많이 나는 남자였다. 결국, 연하남과 내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시들해졌다. 가끔 문자로 안부를 묻고 지내는 누나와 동생 같은 사이가 지속되었다.



 일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고 했던가. 남편이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본 날, 내 눈은 미세하게 떨리고 말았다. 그렇다, 나는 제복 입은 남자에 대한 로망이 있는 여자였다. 연하남의 새로운 모습에 조금씩 그에 대해 알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 우리는 주말을 이용해 부산으로 기차여행을 갔다. 기차 안에서 나눈 진지한 대화에서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조차도 잊고 지냈던 오래전 내가 그에게 한 소소한 말도 기억하고 있는 그는 참 다정한 사람 같아 보였다. 연하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의 진가를 더 빨리 알아봤을 텐데 나는 뒤늦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다정함은 결혼생활 중에도 불쑥불쑥 튀어나왔는데 특히 변기를 뚫어줄 때의 다정함이란 내가 느낀 세상 모든 다정함을 갖다 놓는다고 해도 비교할 수준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첫째를 육아하면서 나는 없던 변비가 생겼다. 잠에 민감한 아이는 잠시도 나와 떨어져 바닥에 누워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먹는 것도 잠시 쉬는 것도 늘 아이와 함께했다. 참을만했다. 그런데 생리적 현상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할지라도 거사를 치르는 중요한 순간 나를 빤히 보고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불편했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대신 남편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작정 변을 참기로 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넘도록 변을 참는 것이 습관이 되자 결국 나는 변비에 걸리고 말았다.



 변비에 걸린다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묵은 변을 밀어내다 피를 보는 일도 허다했다. 몸으로 오는 고통은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겨우 찾는 화장실에서 변기가 막히는 고통은 내 자존심에 금이 가게 했다. 아니, 변기에 대변인식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내 변만 통과시켜주지 않는지 억울했다. 하지만 나는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이 남편이 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결과물을 보기 전에 열심히 변기를 뚫어야만 했다.



 문제의 그 날도 며칠 만에 겨우 찾은 화장실에서 변기에 농락을 당해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변기를 뚫는 중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날따라 변기는 내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나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끝끝내 일 처리를 끝내지 못해 살포 덮어둔 변기 뚜껑 위에 메모지 한 장을 붙였다.

‘죄송합니다. 안방 화장실을 이용하세요. 오늘 안에는 꼭 해결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메모지를 붙이는 것이 수치스러웠지만, 남편이 변기 뚜껑을 무심코 열었다가 내게 실망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는 다시 변기와 씨름을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는데 변기 뚜껑이 열려있는 것이었다. 남편이 내 거대한 결과물을 봤다는 것에 창피함이 밀려와 나는 변기의 멱살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그 창피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변기 뚜껑 위 내가 붙인 메모지 하단에 남겨진 글을 본 순간 감동이 밀려왔으니 말이다.

‘이제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마음껏 이용하시오!’

남편이 아침 일찍 일어나 변기를 뚫어 놓고, 마음이 불편했을 나를 위해 메모를 남긴 것이었다. 나는 창피함도 잊은 채 마음속에 감동의 물결이 일렁여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이 다정한 사람을 봤나!”

남편의 다정함이 묻어있는 메모와 말끔하게 처리해놓은 변기를 보고 나는 아침부터 여러 차례 남편에게 감동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은근슬쩍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자, 오늘은 속이 안 좋으니 저녁은 건너뛰겠다고 농담을 하는 남편 덕분에 민망함도 잊었다.



 나는 이런 다정한 남편이 너무 좋다. 갑자기 멀리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이 보고 싶다. 그래서 솔직한 내 마음을 담아 남편에게 고백하려고 한다.

“여보~ 그동안 내가 좋은 것들 볼 때마다 당신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잖아. 사실, 나는 변기 볼 때마다 당신이 제일 많이 나. 얼른 돌아와서 변기 좀 뚫어주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