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딱 1년만 혼자 키우겠습니다
“양성입니다. 희미한 두 줄 보이시죠?”
전날 고열이 난 첫째는 그렇다 치고, 아무 증상 없던 둘째도 코로나 양성이라니 나는 비통함을 금치 못한 채 의사에게 되물었다.
“어제저녁 자가진단키트 할 때는 분명 음성이었거든요….”
의사는 집에서 하는 것과 병원에서 하는 검사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첫째와 둘째에게 신속항원검사에 이어 PCR 검사까지 받고 가라고 했다. 이미 자가진단키트로 검사한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검사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안으로 들어가기를 격렬히 거부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교육부에서는 코로나 확산세에 대비하고자 주 2회 선제 검사를 권고했고, 유치원으로 자가진단키트를 배부했다. 그날 이후 엄마들에게도 비상이 걸렸는데 검사를 하기 위해 긴 면봉으로 아이의 코를 쑤셔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잡는 듯한 마음이 드는 이 검사는 아이도 엄마에게도 지옥의 맛을 경험하게 했다. 자가진단키트 검사에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그것보다 더 눈물이 찔끔 난다는 PCR 검사를 첫째와 둘째가 받아야 한다니 나는 눈앞이 깜깜해져 울고 싶었다.
병원 대기실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엄마들로 북적였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어느 엄마는 PCR 검사를 안 하겠다는 아이를 협박하는가 하면 어느 엄마는 아이를 회유하는 등 각양각색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협박과 회유 대신 협상을 선택했지만, 막상 검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아이들은 겁에 질려 온몸으로 거부했다. 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아이의 두 손을 내 손으로,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아이의 몸은 내 다리로 거의 포박하다시피 한 후에야 검사를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엄마가 자신의 몸을 강하게 잡은 것이 서러웠던 것인지 PCR 검사가 아파서인지 모르겠으나 첫째는 검사실을 나서면서 오열했다.
누군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하신다면 나는 그저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냈을 뿐이고, 날씨가 좋아 놀이터에 두어 번 다녀온 것, 그것이 다라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것도 마스크를 잊지 않고 꼭 한 채로 말이다. 만약 아이에게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물으신다면 아이는 그저 엄마가 씌워준 마스크에 온종일 코와 입을 가린 채 유치원에 갔고, 놀이터에서 신나게 논 게 다라고 할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코로나 확진자가 되다니. 내 복잡한 심경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기나긴 가정보육이 시작됐다.
아이들의 코로나 확진 소식에 남편에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던 남편은 우리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인터넷이 가능한 곳으로 들어왔을 때쯤에야 내가 보내 놓은 메시지를 읽고 놀란 남편이 바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뚝뚝 끊기는 통화에도 남편의 안타까운 마음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 여보 힘들어서 어떡해….”
남편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나 싶은 마음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이제 와서 ‘도대체 어디서 전염되었을까?’ 따져 묻는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묻고 싶었다. 누구보다 더 열심히 방역지침을 지켰던 아이들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신 것인지….
뉴스에서 연일 전파력이 강한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에 특히 백신 접종 대상이 아닌 0~11세의 소아 확진자 수가 한 달 사이 2만 명에서 32만 명으로 ‘16배’ 폭증했다고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우리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2년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가족 중 그 누구도 코로나 확진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코로나 확진자가 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나는 대역죄인이 된 마음으로 놀이터에서 함께 놀았던 아이의 친구 엄마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수십 번을 고민하다 어렵사리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사정을 설명했다.
“00 엄마~ 우리 집 애들이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이 나왔어. 미안해서 어떻게…. 정말 미안해”
우리의 불찰이든 아니든 이 말을 전하는 것은 하기도, 듣기에도 힘든 것이었다. 나도 이러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심정이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제발 우리 아이는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도 들었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나는 그들에게 미안함을 넘어 죄스럽기까지 했다. 다행히 친구 엄마는 나를 위로하며 당분간 자신의 아이를 잘 살펴볼 테니 내게는 우리 아이들 간호에 힘쓰라고 말해줬다. 나는 그 말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이들은 장난감 방에서 격리 생활을 시작했다. 2평 남짓한 그 방은 아이들에게는 마치 감옥과도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방은 머무르는 아이들에게도 계속해서 들락날락해야 하는 내게도 고역인 곳이었는데 열이 떨어져 컨디션을 회복한 아이들은 답답한지 자꾸만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기를 썼다. 그러면 나는 다시 방으로 밀어 넣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아이들을 방으로 밀어 넣고 나면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방으로 밀려 들어가는 첫째, 둘째 말고도 안타까운 또 다른 아이가 있었으니, 그건 우리 막내다. 내가 잠시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장난감 방에 들어갈 때면 막내는 어김없이 방문 앞에 서서 나를 애타게 찾으며 눈물 콧물을 다 뺐다. 그야말로 우리는 방문 하나를 두고 ‘나오려는 자’와 ‘들어오려는 자’가 대치하고 있는 극한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 와중에 다행이라면 아이들이 크게 아프지 않고 코로나를 잘 이겨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나는 세상에 절대적인 일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나한테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오만을 버리기로 했다. 이렇게 때때로 찾아오는 시련은 단독육아를 하는 내게 큰 고통을 주었지만, 나는 엄마이기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해내야만 했다.
아이들이 격리되어 있는 장난감 방을 환기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창문 사이로 평소 우리를 지켜주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던 방범창이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쇠창살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 너머에는 예쁘게 핀 노란 봄꽃이 ‘그 안에서 답답하게 뭐 하고 있느냐?’며 물어오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눈이 시려왔다. 바깥은 봄인데 안은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겨울과도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