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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셋맘 May 24. 2022

10미터를 앞에 두고

Part2. 딱 1년만 혼자 키우겠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대구 외곽에 위치한 면 단위의 작은 동네 ‘현풍’이라는 곳에서 자랐다. (지금은 승격해서 읍이 되었다) ‘검을 현’, ‘바람 풍’의 한자를 쓰는 ‘현풍’은 깊고 그윽한 정취를 품은 풍경이 아주 좋은 곳이다. 우리 동네가 얼마나 아름답냐면 학창시절 도시에서 출퇴근하시던 선생님들이 학교 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논을 보고 감탄하실 정도였는데 때에 따라 벼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풍경이 일품이라 칭찬이 자자했다.



 모내기 철이 되면 논에 벼가 촘촘히 심어지고, 이내 벼는 우리의 무릎까지 쑥쑥 자라 있었다. 초록으로 수놓은 논이 노란 물결을 이루어 가면 우리의 눈도 함께 알록달록해졌다. 바람이 불면 벼가 내는 소리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는데 바람과 벼의 멋진 콜라보 연주가 귀를 간질이는 듯했다. 몇몇 선생님들은 수업시간 중간에 창밖을 응시하면서 그 풍경을 음미하셨고, 꼭 수업을 마칠 때쯤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너희들은 이 동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 현풍이 아니면 어디서도 이런 풍경은 볼 수가 없단다.”

선생님의 칭찬에 나는 특혜를 누리는 사람처럼 뿌듯했고, 대구라는 명칭을 붙이기엔 너무 시골이라 ‘촌사람’이라 불리던 서러움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듯했다.



 지금의 현풍은 도시개발로 그 모습을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어져 아쉽다. 꾸밈없는 모습이지만, 내게 최고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그립기만 하다. 또 하나 그리운 것이 있다면 그 시절 함께 자란 소꿉친구다. 이따금 떠오르는 내 어린 시절에는 항상 나영이가 있었다. 나영이는 우리 옆집에 살던 친구다. 종로에서 레코드 가게를 하던 우리 집 옆으로 나영이 부모님이 하시던 책방이 있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모여 동네를 누비고 다녔는데 나는 나영이와 냇가에서 소꿉놀이하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냇가 옆 자갈밭에 크고 평평한 돌을 가져다 그 위에 앉아서 우리는 소꿉놀이를 했다. 빨간 벽돌 조각과 풀을 뽑아다 빻고, 밥을 짓는 시늉을 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놀던 그 시절 우리는 순수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나영이는 냇가에서 추억보다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기억이 더 또렷하던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어린 시절을 나눈 친구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와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영이는 점차 소식이 뜸해졌는데 다시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엄마를 통해서다. 나영이엄마와 연락을 하고 지내던 엄마는 종종 나영이 안부를 전했다. ‘나영이 이번에 결혼한다더라.’, ‘얼마 전에 둘째 낳았대.’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아직 어린 나영이 모습이 그득한데 벌써 결혼을 해서 애까지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연히 나영이를 만나게 된 것은 친구의 결혼식에서였다. 그 계기로 다시 연락하며 지냈고, 드문드문 생사확인을 하는 정도의 안부를 물었다. 이것도 내가 출산과 이사를 하면서 점차 뜸해졌고, 그렇게 지금까지 흘러왔다. 내가 나영이 다시 소식을 들은 것은 고향으로 이사를 한 후였다. 남편이 해외파병으로 출국을 앞둔 시점에 나는 비빌 언덕을 찾아 친정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우리 집에 와보시고는 은연중에 이 근처 어디쯤 나영이가 살고 있을 거라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흘렸다. 몇 년 만에 듣는 나영이라는 이름에 나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고, 빨리 만나고 싶어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용기를 내서 오랜만에 나영이에게 연락을 한 날이었다. 나영이를 통해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이사한 곳 바로 맞은편 아파트에 나영이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거리는 불과 10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10미터 거리에 그리워하던 친구가 살고 있다니! 앞뒤 전후 따지지 않고 바로 약속날짜를 정했다. 나영이를 만날 날이 다가올수록 설렜다. 변수가 생기기 전까진 말이다.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오자 평소 잘 아프지도 않던 우리 아이들이 돌아가며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약속 당일에 아이가 고열까지 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영이와의 만남을 미뤄야만 했다.



 다시 약속날짜를 정하고 그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나영이와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차 있던 찰나, ‘띠링’하고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영이의 큰 딸이 갑작스럽게 아파 등교를 하지 못했다고, 다음에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해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약속날짜에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잡은 약속 날에도 우리는 일이 생겨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석 달쯤 흘렀을까. 나영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다희야~ 우리 이번 주에는 꼭 만나자. 다음 주부터 우리 딸 방학이거든.’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친구의 문자에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만나야지 각오를 다졌다. 양쪽 집 아이 모두 아프지 않길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나영이와 만나기로 한 날, 다행히 우리 집도 나영이네도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10미터를 앞에 두고 돌고 돌아 다섯 달 만에 재회할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친구와 나는 서로를 그저 신기하게 바라봤다. 너무 좋아서 그리고 우리의 변한 모습이 어색하기도 해서였다. 이런 마음은 ‘우와’라는 감탄사를 계속 내뱉게 했다.

“우와~ 니 진짜 많이 변했다.”

“우와~ 니도 마찬가지다~ 야.”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던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커서 짝을 만나고 애를 둘, 셋씩이나 낳아 키우게 되었는지 우리는 서로가 신기했다. 그리고 함께 보낸 어린 시절 해맑았던 그때의 우리가 떠올라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가 이내 감동이 밀려와 울컥했다. 정말 아쉽게도 아이들의 하원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옛 추억을 공유하기엔 충분했다. 짧은 만남이 못내 아쉬웠던 우리는 다음 날 나영이네 집에서 또 한 번의 수다 파티를 한 것을 끝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엄마에게 약속은 이런 것이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지만, 서로 서운함을 느끼지 않은 것. 다시 만날 때를 천천히 기다리는 것. 이것이 엄마들의 만남에 암묵적인 룰이 되었다. 아이가 없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우리는 하나씩 배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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