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셋맘 Jun 02. 2022

이름을 잃어버린 그대에게

Part1.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다

 “안녕하세요. 오늘 강의를 맡은 강사 최다희 입니다.”

CS강사로 활동하면서 강의를 시작할 때 내가 했던 인사말이다. 사람들도 나를 강사님 혹은 선생님으로 불렀는데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좋았다. 강사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전문적인 느낌이 드는가 동시에 스스로도 커리어우먼으로 느끼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누가 나를 이렇게 불러줄까 싶어 평생 내 이름 뒤에는 강사라는 단어가 있길 속으로 바랐다.



 강사로 불리던 내게 새로운 호칭이 생긴 것은 결혼하고 나서다.

“며늘아~”

시부모님은 나를 결혼 전에는 ‘우리 아들 며느릿감’이라고 부르시다가 결혼 직후 ‘며늘아’라는 정식명칭을 하사하셨다. 낯간지럽고 쑥스러웠지만, 풋풋한 새댁 느낌이 들어 새로운 호칭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다음으로 생긴 호칭은 ‘애미’와 ‘아기엄마’다. 드디어 내가 출산을 한 것이다. 시부모님은 나를 ‘애미’라고 호칭을 달리 부르셨고, 아이와 연관된 모든 사람이 나를 ‘아기엄마’라 불렀다. 첫째가 태어나고 또 한 번 호칭의 변화가 생기면서 나는 때에 따라 바뀌는 내 호칭이 이상하면서도 그저 신기했다. 그리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서진 엄마’ 혹은 ‘어머님’으로 불리고 있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아이와 같은 반 친구 엄마가 내게 이름을 물은 적이 있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오랜만에 내 이름을 묻는 이가 나는 반갑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조금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음. 최다희에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친구 엄마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어, 딸이에요? 난 아들이라고 알고 있는데….”

맙소사! 그녀는 내 이름이 아닌 아이의 이름을 물어본 것이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출처 unsplash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나는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매번 바뀌던 새로운 호칭에도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찌 보면 그게 엄마로서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내 이름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내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가끔 병원을 찾을 때 내 이름을 묻는 직원과 불러주는 기계음 말고는 내 이름을 말할 일도 불릴 일도 없어졌다. 아이의 이름이 곧 내 이름이고, 아이의 얼굴이 내 얼굴이 되었다. 친구 엄마가 내게 한 질문은 잊혀져가는 내 이름을 다시 찾고 싶게끔 마음을 불태웠다.



 그동안 아이의 친구 엄마들과 친분을 쌓고 지내면서 서로의 이름을 물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나 되새겨봤다.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없진 않았나 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이름만 물었을 뿐 불러주진 않았다. 쑥스러워서 그랬을까? 익숙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마도 아이로 맺어진 인연이기에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 엄마로 불리고, 부르는 것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아이를 통해 만났더라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충분히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상대가 생긴다면 반드시 이름을 불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최근에 그런 친구를 만났다. 첫 만남부터 유독 말이 잘 통하는 그녀는 첫째 아이와 같은 반 친구의 엄마다. 나이도 같고, 해왔던 일마저도 비슷한 그녀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만날 때마다 아이의 이야기보다 우리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사이로 마치 오래된 친구 같기도 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이름을 물었고, 누구 엄마 대신 이름을 불러주게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다. 이 시를 보면서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주던 날이 떠올랐다. 내 이름 석 자가 그녀의 입을 통해 불리는 순간, 찌릿하고 전기가 통한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토록 되찾고 싶던 내 이름을 그녀가 불러주었다.



 나는 상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들은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자신의 이름 대신 새로운 호칭을 얻는다. 자신의 이름이 흐릿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새로운 호칭에 적응해 나간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이 자신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훗날 아이가 훌쩍 자라 우리를 떠나더라도 나로 온전히 내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말이다. 만약 주변에 우정을 나누고 싶은 이가 있다면 오늘은 내가 먼저 그의 이름을 불러 마음에 꽃을 피워주는 것은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어서 와 군관사는 처음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