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를 자연분만으로 출산하고 2년이 지난 시점, 나는 둘째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막달이 다가올수록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는데 의사도 진료할 때마다 초음파를 보면서 나를 안타까워했다. 의사가 추천한 일명 ‘고양이 자세’를 열심히 했건만 아이는 굳건히 자신이 원하는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임신 중기부터 쭉 거꾸로 자리를 잡고 있던 아이는 출산예정일이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연분만이 가능한 머리가 아래로 향하는 자세를 취해주지 않았다. 애가 탔다. 첫째를 자연분만한 나로선 둘째를 배를 갈라 억지로 꺼낸다는 게 영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고양이 자세’는 물론 틈만 나면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제발 출산이 가능한 자세로 돌아와 달라고 빌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역아회전술’을 받아보려고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둔위회전술(역아회전술)이란 임신말기에 태아가 역위(둔위, 엉덩이가 아래로 있는 자세)로 있을 때 산모의 복부를 손으로 밀거나 조절하여 태아 위치를 정위(두위, 머리가 아래로 있는 자세)로 교정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중앙대학교병원 건강칼럼 참고)
서울에 한 대학병원에는 ‘역아회전술’의 대가로 불리는 의사가 있었다. 관련 자료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생생한 후기를 보자 나도 모르게 도전할 의지가 샘 솟았다. 그런데 역아회전술을 받기 전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 역아회전술은 37주 이전에는 시행하지 않는데 자연적으로 태아의 위치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술이 임신 후기에 진행되는 만큼 시술 중 발생하는 상황에 따라 응급수술을 할 수 있다는 글을 보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하여 다니고 있던 산부인과 의사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선생님~ 제가 역아회전술을 받아서 자연분만하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의사는 내 물음에 생각지도 못한 답을 내놓았다.
“아이가 이 자세가 편하니까 이렇게 있는 거예요. 역아회전술을 받더라도 분만 전에 다시 태아의 위치가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요. 자칫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어서 저는 굳이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다.
2018년 11월 26일. 나는 남편과 함께 간호사의 설명에 따라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곧 제왕절개 수술을 앞두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아이가 편해서’라는 의사의 한 마디가 나를 움직였고, 결국 제왕절개분만을 선택하게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수술실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순간, 나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남편에게 전했다.
“여보… 만약에 수술 중에 내가 잘못되면 우리 서진이 잘 키워줘….”
수술을 앞두고 있는 불안한 자가 하는 일종의 쓸데없는 걱정의 말이었다. 남편은 내게 걱정 말고 수술이나 잘 받고 오라고 핀잔도 응원도 아닌 것을 해주었다. 나는 이 쓸데없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제 발로 수술실에 걸어 들어갔다.
분만 준비를 마칠 때까지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워 대기했다. 수술실 온도는 훈훈했으나 내 몸은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연분만할 때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압도당한 것이 분명했다. 나를 비추고 있는 환한 조명과 그 옆으로 나열된 수술 집기는 수술실을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나를 공포로 밀어 넣었다. 그보다 나를 더 두렵게 한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출산의 모든 과정을 전적으로 의료진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 일 없이 아이를 만날 수 있길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긴장되는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고, 내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아이의 순간을 보고자 하반신 마취를 선택한 것까지도 후회가 됐다.
척추마취를 하자 누가 다리에 얼음물이라도 쏟은 것처럼 차가워지더니 이내 감각이 둔해졌다. 드디어 의사가 수술실로 들어오고, 내게 다가와 간단히 안부를 물었다. 수술실에서 처음으로 아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수술 시작합니다.”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귀에 헤드셋이 씌워졌다.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이 내 긴장을 조금 풀어주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의사는 지체없이 내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배 위에 묵직하게 가해지는 썩 좋지 않은 느낌 뒤로 더 상상하기 싫은 일이 펼쳐졌는데 갈라진 내 배를 사정없이 젖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배가 찢어지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의사는 내 배를 벌리고 또 벌렸는데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한참을 내 배를 벌리던 의사가 잠잠해졌다. 드디어 아기를 꺼낼 차례인가 싶어 나는 속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옆으로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거친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돛단배처럼. 그제야 의사가 한마디 했다.
“이제 아기 꺼냅니다.”
몇 차례 내 몸이 세차게 흔들리고 나서야 나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드라마와 현실과의 간극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배를 가르고 아기를 단번에 ‘쏙’하고 잘만 꺼냈지만,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가 느낀 제왕절개로 아기를 꺼내는 느낌은 이러했다. 작은 구멍에 꽉 끼어 있는 물체를 한 번에 꺼내기가 힘들어 여러 번 양옆으로 흔들어가며 겨우겨우 꺼내는 ‘아주 힘겹게’라는 말이 걸맞은 그런 작업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꺼낸 아기를 만나자 나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이 흘렀다. 아기를 만난 기쁨보다 수술 중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안심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제왕절개분만의 진짜 고통은 마취가 깨면서부터였다. 병실로 옮겨져 수술한 부위에 모래주머니를 얹거나 복대를 감아주는데(이는 병원마다 다르다.) 간호사가 상처 부위를 짓누르는 순간 나는 고통에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때부터 시작된 고통은 종일 꼼짝달싹할 수 없이 누워있어야 하는 답답함으로 이어졌고, 중간중간 훅치고 들어오는 통증에 무통 주사 버튼을 누르느라 내 몸 중 유일하게 손가락만 바삐 움직이게 했다.
수술 후 이틀째 되던 날, 의사는 내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 연습을 해야 한다며 숙제를 내주었고, 당기는 배를 움켜잡고 온종일 연습한 끝에 몸을 일으키고 앉자 의사는 다시 서서 걷는 연습을 하라는 거대한 미션을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몸을 일으키는데도 거의 하루를 다 썼는데 이제는 일어나 걸으라니 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지 이틀밖에 안 된 사람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은 아닌지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빠른 회복을 위한 일이라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남편을 지지대 삼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힘겹게 일어나서 한 발자국 떼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마치 걸음마를 연습하는 아이처럼 조금씩 걷는 연습을 한 덕분에 나는 수술 후 삼 일째가 되던 날, 내 발로 걸어서 신생아실을 처음으로 찾았다. 폴대에 의지해 신생아실에 서 있는 나와 달리 멀쩡하게 서 있는 자연분만한 산모를 보니 확연히 차이나는 회복속도에 ‘역시 자연분만이 최고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수술 부위 통증이 점점 사그라들자 제왕절개분만의 장점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는데 그중 최고는 단연 회음부 절개의 고통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연분만 시,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회음부 통증은 생활하는데 불편감을 줄 정도였다. 그런데 제왕절개로 분만했으니 나는 그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됐거니와 도넛 방석 없이 편하게 앉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걷는 연습을 시작하자 회복속도 또한 빨라졌는데 퇴원할 때쯤에는 몸이 가뿐할 정도였다. 그래서 제왕절개분만도 자연분만 못지않게 장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자연분만의 고통은 일시불이고, 제왕절개의 고통은 할부라고 했던가. 제왕절개 수술 부위는 배꼽 아래 한 뼘 남짓으로 아주 예쁘게 잘 봉합되어 보기 싫지 않을 정도의 실선을 남겼다. 시간이 지나자 실선 한가운데 딱 3센치 가량이 켈로이드 살성처럼 볼록하게 올라왔고, 습한 장마철이 되면 그 부위가 미친 듯이 가려웠다가 따가웠다가를 반복했다. 무려 3년 뒤 막내를 제왕절개로 수술할 때까지도 그 고통은 계속됐는데 더 큰 문제는 막내를 출산하고도 지금까지 그 3센치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쯤 괜찮아질지 아니, 괜찮아지기는 하는 것인지 이제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제왕절개의 할부 고통을 느끼고 있다.
자연분만과 제왕절개분만 모두를 경험한 내게 지인들은 묻곤 했다.
“어떤 분만이 덜 고통스러웠어?”
나는 이 물음에 확실한 답을 줄 수 있었다.
“덜 고통스러운 분만은 없었어….”
비록 두 가지 분만을 다 경험한 나는 불운의 산모가 됐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을 무사히 만났으니까.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