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파병은 남편의 오랜 꿈이었다. 군 생활 중 특별한 경험과 도전을 하고 싶었던 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우리가 결혼하고 애가 둘이 된 후에도 해외파병 얘기를 꺼내곤 했다. 나는 거기에 맞서 ‘당신이 해외파병을 갈 수 없는 이유’를 댔는데 연애할 때와 신혼일 때는 떨어져 있기 싫어서, 아이가 하나일 때는 애를 혼자 키운다는 게 상상도 못 할 일이라서, 아이가 둘이 되었을 때는 애가 둘인데 어딜 가냐며 딱 잘라 말했다. 내 반응에도 남편은 이따금 ‘이번에 00선배 파병 간다더라’라며 지인의 이야기를 했는데 내 귀에는 그 선배의 해외파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해외파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속내를 훤히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막내가 태어나고, 아이가 셋이 되자 남편은 이따금 얘기하던 파병에 ‘파’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자신의 처지를 아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막내가 5개월쯤 되었을 때다. 남편과 저녁 식사 중에 지난 근무지에서 함께 일했던 후배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여보~ 종인이가 인천에 온다네?”
남편은 낮에 후배와 통화하면서 후배가 우리 집 근처 ‘국제평화지원단’이라는 곳에 교육을 받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하는 남편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왜?”
남편의 속도 모르고, 나는 종인씨가 대체 무슨 교육을 받길래 우리 집 근처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번에 파병 간데. 국제평화지원단에서 파병교육 받는다네….”
오랜만에 듣는 파병이라는 말에 나는 남편의 표정이 왜 그렇게 복잡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남편을 보니 내 마음도 따라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직도 가고 싶어?”
솔직히 남편의 의중 따위가 궁금했다기보다 혹시라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작은 불씨가 있다면 확실하게 꺼주고 싶은 마음에서 내가 물은 질문이었다.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근데 이번에 못 가면 더 이상 기회는 없을 거야.”
남편 말로는 파병도 갈 수 있는 시기(계급)가 있다고 한다. 그 시기가 지나거나 자격요건을 충족하지 못해도 해외파병에 지원할 수 없다고 남편은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남편의 말에 갑자기 내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다. 마지막 기회라니. 지금이 아니면 남편의 오랜 꿈을 접어야만 한다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결국 나는 남편으로 빙의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라면’이라는 가정하에 나는 내게 묻기 시작했다. ‘나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도 가고 싶을까?’, ‘나라면 오랜 꿈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나라면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효과가 있었다. 답을 바로 얻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가야지!’
다음 날, 출근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내가 밤새 생각해봤는데 파병…. 그거 지원해봐.”
남편은 내 말에 당황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마디 했다.
“진짜 괜찮겠어? 혼자서 애 셋을 어떻게 보려고….”
나는 남편의 말에 파병을 정말 가고 싶었구나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안 간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남편은 작년 9월,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남편이 파병 간 곳은 동아프리카에 있는 국가 중 하나인 ‘남수단’이라는 곳이다. 왠지 낯설지 않은 이 나라는 이태석 신부가 살아생전에 봉사활동을 하신 곳이다. 그 봉사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배경이기도 한 곳이 바로 남수단이다. 남편은 출국 전 2개월가량 국제평화지원단에서 파병교육을 받으면서 남수단에 먼저 가 있는 동료들을 통해 현지 상황을 들을 수 있었고, 내게도 귀띔해줬다.
“새벽 시간에 영상 통화하면 잘 된대~ 여보”
아이들이 아빠를 보고 싶어 할까 걱정하던 내게 남편이 희소식을 전했다. 인터넷 속도가 말도 못 하게 느리지만, 사람들의 이용이 적은 새벽 시간대에 영상통화를 하면 나름 괜찮다고 동료들이 말해준 것이다. 우리나라와 남수단은 7시간 정도 시차가 난다. 남편이 연락을 주는 시간은 아쉽게도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남편의 소식을 듣고,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남편이 남수단에 도착하자 우리의 걱정과 달리 큰 어려움이 없이 모바일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고, 영상통화도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 있을 때처럼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보낸 아이들의 사진도 5초만 기다리면 볼 수 있다고 남편은 좋아했다. 원래 이렇게 느긋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남편은 남수단 땅을 밟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은 좀 달랐다. 아프리카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데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가 되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비가 쏟아지고, 그로 인해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아 연락이 어려웠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가 오길래 인터넷이 안 되나 했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수준의 양이라는 것을 남편의 말을 통해 실감하게 되었다.
“여보~ 여기는 비가 한번 오잖아? 그럼 길이 사라져.”
나는 이 말을 듣고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사실이냐 되물었다. 비가 올 때 우리나라 장마철에 내리는 비의 양에 2배 정도 더 많은 비가 내린다는 말을 듣고서야 길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흙길이라서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나름에 추측도 해봤다.
남편에게 길은 중요했다. 공병인 남편은 ‘한빛부대’ 소속으로 주로 도로 재건지원 임무를 하고 있다. 중장비를 타고, 수리하면서 현지에 도로를 닦는 일을 하는 남편에게 비는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비가 오면 내가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아 속상한 것처럼 남편에게도 비는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나도 질릴 정도라고 하니 나는 진심으로 그 모습이 궁금해졌다.
엄청나게 내리는 비 말고도 남편이 말과 사진으로 전해주는 이색적인 현지의 모습은 하나같이 신기했다. 들판을 활보하고 다니는 야생 사자의 모습은 아찔하다 못해 머리칼이 삐죽 서게 했는데 그런 나와 달리 아이들은 신기하다며 소리를 지르고 직접 보고 싶다고 애원했다. 아이들의 반응을 보자 남편이 파병을 가서 좋은 점도 있구나! 잠시 흐뭇했다. 아찔한 사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날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보이는 뱀 영상을 찍어 보낸 적이 있다. 남편 말로는 2미터 정도 되는 비단뱀이라는데 내 눈에는 딱 아나콘다처럼 보였다. 길이가 얼마나 긴지 또 둘레는 얼마나 큰지 돌을 갓 넘긴 우리 막내의 허리둘레는 족히 넘어 보였다. 이번에도 아이들과 나는 영상을 보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서로 담고 있는 의미는 전혀 달랐다. 이 외에도 숙소에 자주 출몰한다는 몽구스와 도마뱀과 같은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을 사진을 보내 우리를 환호하게 했고, 특히 남편이 작전을 나가서 봤다는 사자, 가젤, 하이에나, 전갈 등의 다양하고 희귀한 야생 동물 이야기는 나와 아이들의 머릿속에 자연적으로 세렝게티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
남편도 파병을 간 후, 생각하는 것이 조금 달라진 듯 보였는데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바가 많아 보였다. 가장 먼저 가족의 소중함을 많이 느낀다는 남편은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현지 아이들을 보면 남다른 감정이 든다고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다 떨어진 옷과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을 안타깝다고 했다. 특히 군인들에게 다가와 다른 것도 아닌 물을 달라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남편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많은 돈도 쓸모가 없으며, 한국에서 쉽게 구하고 썼던 생활용품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파병대에 선발된 우수한 인력이라는 자부심으로 남편은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존경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아빠는 한국을 빛낸 위인이야.”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내게 한 말이다. 내가 남편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듯 아이들도 아빠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가 한 말은 아빠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했던 남편과 내게 큰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해외파병이 남편뿐만 아니라 나와 아이들에게도 평생에 한 번뿐인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거라 믿게 되었다. 남편은 올해 겨울쯤 귀국을 앞두고 있다. 하루빨리 만나서 그동안 못한 얘기를 마음껏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