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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셋맘 May 23. 2022

사계절을 만지는 아이

Part3. 무늬만 엄마에서 진짜 엄마가 되다

 시골 동네에 살았던 나는 사계절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봄이 오면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논과 밭으로 쑥을 캐러 다니고, 여름이 오면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수영을 했다. 가을이 오면 동네 뒷산에 올라 낙엽을 밟으며 도토리를 주웠고, 차디찬 겨울이 오면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다가 먹고, 코와 볼이 빨개질 때까지 차디찬 눈을 만졌다. 자연은 일 년간 네 번의 옷을 갈아입으며 내 눈과 코와 손에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어린 시절 자연은 나에게 친구이자 삶 그 자체였다. 지금은 이 값진 경험을 하려면 애써 찾아서 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서 아쉽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몽글몽글 맺혀있던 꽃망울이 움을 트는 봄이 오자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눈이 녹은 자리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풀 사이사이로 노랗게 얼굴을 내민 민들레가 우리의 발목을 잡아 세웠다. 아이들과 나는 꽃이 지면 민들레 씨앗을 날려보기로 약속했고, 봄바람이 불던 날 멀리 날아가기를 준비를 하고 있는 민들레씨를 우리는 꺽어들었다. 양 볼에 있는 힘껏 바람을 불어넣어 ‘후후~’ 불기 시작하자 민들레는 홀씨가 되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마치 우리의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어른인 나와 달리 어린 둘째는 바람보다 침이 더 많이 나오긴 했지만, 야무지게 민들레씨를 들고 연신 입바람을 불어대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름이 되면 우리는 갯벌로 향했다. 갯벌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에게 새로운 자연의 맛을 알려준 갯벌은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었다. 서서히 빠지는 물은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우리가 충분히 갯벌을 탐색할 수 있도록 멀리서 기다려주는 듯했다. 물이 빠진 자리에 민낯을 드러낸 갯벌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접한 해양생태계는 평소 책으로만 봤던 게와 망둑어 그리고 조개로 가득했는데 눈으로 직접 보고 있자니 아이들도 나도 너무 신기해서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었다. 갯벌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고, 통에 가득 찰 정도의 조개도 선물해 주었다. 새까맣게 탈 정도로 여름을 만끽한 우리는 자연스레 다음 계절을 기다리게 되었다.









 알록달록 세상을 예쁘게 물들이는 가을이 드디어 찾아 왔다. 가을은 첫째와 둘째가 태어난 계절이기도 하다. 봄을 애찬한 나는 풀 내음과 흙바닥에 떨어지는 비 냄새를 그리워하며 봄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가을이 좋아졌다. 아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계절도 바꿔놓는 힘이 있었다. 첫째 아이 돌잔칫날 거리에서 찍었던 스냅사진은 가을과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울긋불긋 물든 나무 사이에 내리쬐는 햇빛은 우리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말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이었다. 매년 보던 단풍도 아이들로 인해 달리 보이던 날, 마치 아이들이 내가 가을과 사랑에 빠지도록 때를 맞춰 찾아온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해보기도 했다. 같은 계절임에도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게 된 가을은 아이들과 내가 낙엽을 밟고, 은행나무를 구경하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사는 곳마다 근처에 큰 은행나무가 한그루씩 있어 준 덕분에 우리는 은행잎이 초록에서 노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고, 이윽고 은행나무가 노란 물결을 이루자 넋을 놓고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구린내에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구린내의 범인이었던 은행을 우리는 마치 지뢰인 양 밟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 걷다가 밟기라도 하면, 낙엽을 찾아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콩콩 뛰고, 트위스트 춤을 췄다. 이때 낙엽이 내는 소리가 예술이었는데 마치 바삭한 튀김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귓가에 울리던 그 맛있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그 소리에 신이나 발과 손을 총동원해 낙엽을 비벼대고 낙엽 위를 뒹굴기도 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에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가을 산책의 마무리는 예쁜 단풍잎과 낙엽을 주워오는 것으로 끝났는데 우리는 그것을 스케치북에 붙여 재미난 작품을 만들어 냈다. 가을은 우리를 매년 아마추어 예술가로 변신시켜 주는 고마운 계절이었다.








 고마운 가을이 지나고 나면 사계절의 완성인 겨울이 찾아온다. 아이들이 일 년 중 가장 기다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유야 당연히 눈이다. 아쉽게도 따뜻한 남쪽 나라에 살았을 때는 눈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손에 꼽힐 정도로 눈이 오지 않았고, 눈이 오더라도 다음 날이 되면 녹아 없어졌다. 그런데 수도권으로 이사 한 뒤 아이들은 원 없이 눈 구경을 하게 되었다. 눈이 내리는 날도 많고, 그 양도 어마어마해서 입이 떡하고 벌어질 정도였는데 때를 기다리던 아이들에게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눈이 어느 정도 내린 후 쌓인 것을 확인한 우리는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장갑과 모자, 목도리로 중무장을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은 멀리서 보면 보석을 뿌려놓은 듯 반짝였다. 아이들은 눈이 오면 신나게 뛰어다니는 강아지같이 여기저기 다니며 발 도장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다닌 후에야 장갑 낀 손으로 눈을 쓸어 뭉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눈을 던졌다. 한바탕 눈싸움을 하고 나면 조준 실패로 부상자가 속출하기 마련인데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은 부상에도 치료를 핑계 삼아 철수했다. 감기에 걸려 한동안 고생할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엄마의 말이 아쉬웠던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눈을 만지며 열심히 놀았고, 그 시간이 꽤 즐거웠는지 눈이 오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자고 소리를 높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온몸으로 겪은 아이들은 놀이터에서도 자연을 찾아 놀았다. 마른 땅에서는 개미를 관찰하며 모래 놀이를 했고, 비가 온 뒤에는 놀이터에 그네 밑에 생긴 물웅덩이에 들어가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신발이 젖고, 옷이 젖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아이가 누리고 있는 자연의 산물을 통해 더 큰 배움과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놀이는 쓸데 있는 짓이다> 책에서는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모험하는 법을 터득하고 두려움을 넘어설 줄 알게 된다고 한다. 친구를 사귀고 감정을 조절하며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요령도 익히는 아이들에게 자기만의 이론과 놀이 계획을 시험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고 자유를 허락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그 어떤 교육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즐기는 것은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넘어서 인간관계에도 도움을 준다고 하니 나는 아이들이 이것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사계절을 만지면서 그 아름다움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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